2008년 7월 14일
오랜만에 대구 흥산단
이창기교수와 윤장근 선생님을 뵙고 9시 정각에 흥사단 앞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11시 30분에 봉화 봉성면의 유명한 솔잎 돼지불고기로 점심을 하고 바로 '금계포란'(글닭이 달걀을 품은)형의 유곡(닭실마을)으로 갔다. 작년에 지은 박물관(개인박물관)과 청암정, 고택을 둘러보는데 차종손이 나와서 설명을 해주었다.
전에는 없던 일인데 아마 흥사단에서 왔다고 친절을 다 하는 모습이다.
날씨는 구름만 끼었고 비는 오지않아 답사하는 날로는 아주 좋았다.
다시 마애불 1 구를 보고 "성이성'(춘향전의 이몽룡 모델이라고 함)이 지었다는 창녕성씨 계서당으로 갔다. 계서당에 이르니 종손(명암에는 주손)이 바로 집앞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설명을 듣고 그 때 당시 실내화장실이 있었던 집은 처음이다. 작년 11월에 왔을 때는 수리한다고 얼기설기 나무를 엮어놓아서 사진을 못 찍어서 오늘은 꼭 실내화장실 사진만은 찍어야 되겠다고 생객해서 설명을 듣지않고 화장실 사진 먼저 찍었다.
설명이 끝난 다음 종손과 인사를 나누고 "이몽룡축제를 개최하자"는 인쇄물을 받아가지고 읽어보지도 못하고 다음 답사지인 '축서사'로 갔다. 문수산 바로 밑에 있었는데 아주 높은 지대에 있었다.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 보다도 3년전에 건립했으나 임진왜란때 불에 타고 보광전만이 당시의 건축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들어가는 입구부터 돈 냄새가 물씬 나고 내 눈에는 많이 거슬렸다. 이창기 교수님의 해설로는 탑을 최근에 건조했지만 아주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하였으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우리 고유의 맛이 하나도 없는 굳이 찾는다면 원각사 10층석탑의 3층까지의 모양을 흉내 내었으나 전혀 아니다. 인터넷에서 사전 공부를 하고 갔지만 사리까지 봉안하였다고 되었으나 그것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법종은 신라 성덕대왕신종(경주박물관소장)을 본 따 온 것은 맞으나 몸통은 비슷하나 용뉴부분은 전혀 아니었다. 포뢰를 보니 여의주를 한 발로 꽉 잡고 있는 고려의 용뉴를 본 따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석등은 왜 그리 많이 만드는지 가랍배치에 1사 1등 1탑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쌍탑이 가끕 등장한다.
그러나 요즈음 사찰에서는 돈이 많아서인지 석등이 수도 없이 많다. 이 절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로 만든 석등이 10기는 넘는 것 같다. 진짜 석등은 보광전 앞의 1기인데 보기도 좋고 옛스러웠다.
보광전안의 불상은 돌로 만든 비로자나불상이었는데 방향이 어컨을 향하지 않고 동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아주 특이했다.
석불인데 광배는 나무로 만든 것도 이색적이었다. 닫집은 보궁형으로 오래 된 맛이 났다.
내려오다가 스님 네 분을 만나 탑과 범종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우리 전통을 살려서 만든 것인지 아니면 시대에 맞추어 만들었는지 했더니 웃으면서 시대가 변하다보니 주지스님의 생각대로 했다는 것이다.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을 본 따 온 것 같은데... 말도 끝나기 전에 맞다고 하였다. 내가 다시 종신은 거의 맞습니다. 비천상이나 당좌 구연부분의 파장형까지 그러나 용뉴는 고려시대의 모양입니다. 했더니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느냐고 하기에 포뢰가 고려형이리고만 하고 차 탈 시간이라고 빨리 오라는 소리에 내려왔다. 대구에 도착하니 19시에 약간의 비가 왔다. 이교수의 저녁을 같이 하자는 것을 같은 일행이 있다는 핑게로 그냥 왔다.
★. 대구 흥사단 건물
★. 봉성 솔잎 돼지불고기집
★. 식사중 대구시 소설가 협회장을 지낸 윤장근 선생님
★. 유곡 충재선생의 청암정
★. 금계포란형의 산 모양
★. 조선시대에도 실내 화장실이 있었다. (사랑채 툇마루)
★. 축서사 입구 계단 옆에도 석등 2기가 있다. 심상치 않는 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행스런 것운 우리 석등형식이다.
★. 정체 불명의 5층탑 (둘레에 4기의 석등이 있다.)
★. 옛날부터 내려오는 석등이다. 얼마나 보기가 좋으냐?
★. 보광전의 비로자나불상 석불이나 광배는 나무로 되었다.
★. 물야면의 마애불은 지금 한 창 보수중이다. 코는 다 문드러져 있다.
아마 아기 못 낳는 사람들이 소행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