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의 행보/내가 한일 할일

열암계곡

吳鵲橋 2016. 3. 3. 09:28



경주 남산 열암계곡의 불상을 보고 왔다.


2008년 4월 21일 아침 7시 어린이 대공원앞을 출발한 차는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김원장이 계획에는 없었지만 영천 청제비를 보고 가자고 하였다. 모두가 찬성을 하여 영천톨케이트를 빠지니 바로 청제비가 있었는데 신라때 만든 저수지이고 580년대에 처음 축조할 때 7000명을 동원했다니 그 때의 인구로 보아서 대단한 역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을 잘 못 짠 덕분에 청제비를 볼 수 있었다. (열암계곡을 해설 해 주실 분과 만나는 시각이 맞지않아서)

★.청제비(보물 517호)
영천 청못이라는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기록한 내용과 중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1968년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흔히‘청제비’라고 부른다.
청제비의 전체적인 모습은 화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직사각형의 형태이고,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신라 법흥왕 23년(536)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때 새긴 것이고, 반대면의 신라 원성왕 14년(798)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하였을 때 새긴 것이다. 각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제비 서쪽으로는 조선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
가 있다. 내용은 1653년 비가 두 동강이 나 있는 것을 최일봉씨 등 세 사람이 다시 맞추어 세웠다는 것이다. 영천청제비는 신라 수리시설의 실태와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비각안에는 두 비가 나란히 있다.
★. 영천청제(저수지)
경주문화연구원에 근무하는 채무기라는 분이 오늘의 안내를 맡은 모양인데 그 분과의 만나는 시각이 10시 반이라 7시에 출발 했으니 경주까지 그냥 가면 8시 반이면 충분하니 그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청제비를 보게 된 것이다.
경주 오능 부근에 도착해서 전화를 하니 채선생님이 나와 계셨다. 열암계곡은 일반인이 잘 가지 않는 곳으로 언양가는 길인 삼릉계곡을 지나 한 참을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서 10여분 들어가 차에서 내려 산으로 40분쯤 걸으니 계곡에 시퍼런 천막천을 여기저기 덮은 곳이 보였다. 한 숨 돌리고 채선생님께 발굴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천을 걷고 관람을 하였다. 사진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우선 석불좌상은 임시로 지은 집안에 있었는데 천으로 덮어져 있었다. 천을 벗기고 보니 항마촉지인을 하였으나 불두가 없었다. 불두는 옆에 따로 석고로 떠 놓은 것과 실물은 볼 수 있었다.
새로 발견된 마애여래 입상이 오늘의 주 관람대상이었다. 석불좌상을 모셔 둔 집에서 20여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는 길 위로는 출토 된 여러가지 기와가 쌓여있었는데 어느 여성회원 한 분이 그 기와를 탐내고 있었다. 가지고 가려고 이것 저것을 만져보면서 집에가서 야생화를 키웠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내가"여기 기와는 가져 가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도 계속 만지고 있었다. 몹씨 신경이 쓰이었으나 나도 마애불을 보러 갔는데 그 사이에 가져갔는지 안 가져갔는지는 모르지만 가끔 문화재를 보러다니다보면 이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제발 좀 바른 마음으로 관람만 했으면 좋겠다.

★. 새로 발견된 마애불상의 머리부분 코와 바위가 거의 붙어있다.
(이 때 찍은 사진이 아니고 이미 발표 된 사진임)
마애불은 천을 걷어내자 엎어진 바위 틈새로 거꾸로 불상의 얼굴이 보였는데 코와 맞닿은 바위와의 거리는 불과 4-5센티미터정도이었다. 다행히 코가 다치지 않았다. 이 마애불의 발견도 석불좌상에 대한 발굴을 마치고 철수를 하려고 마지만 작업을 하는 중에 채선생님이 같이 일하는 후배 여자를 바위넘어 가서 보라고 했더니 넘어오지를 않아서 빨리 넘어 오라고 하니"여기 큰 일 났어요"하기에 큰 일은 무슨 큰 일 빨리 넘어오라 했더니 그래도 안 넘어와서 채선생님께서 넘어가보니 마애불상의 발쪽에 약간의 틈새가 있었는데 거기에 머리를 박고 들여다 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이
마애불상이고
코가 제대로 된 불상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석굴암의 불상도 코를 새로 만들어
붙였다
고 하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상의 코를 갈아마시면 아기를 낳는다는 속설 때문데 성한 코를 가진 불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석굴암의 불상마져 코를 새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일으키느냐? 일으키지않느냐?는 아직 모른다고 한다. 일으키다가 잘 못하면 다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고 하였다. 오늘 관람을 한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 된 불상을 발견한 사람을 아는 김재원박사의 덕분으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산등성이를 따라서 천룡사지의 옆식당에서 비빕밥을 먹고 천룡사지의 절터에서 귀부 같은 모양의 돌거북을 보니 귀부는 아닌 것 같았다. 거북의 등에 원형의 구멍이 파여 있었다. 비신이라면 직사각형이어야 하는 데 석등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고 하였다. 처음 보는 형태였다.
★. 천룡사지
★. 거북모양의 받침대(용도는 아직 밝혀지지않았다.)
내려와서 베리삼존불을 보려고 했으나 차를 세울 곳이 없어 보지 못하고 떡과 술 축제를 보러 갓으나 역시 버스는 들어갈 수 없어서 무열왕능을 보았다. 비석의 귀부와 이수의 색깔이 너무나 달라서 같은 시대의 것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무열왕능을 몇 번 보았으나 이렇게 상세하게 보지 않아서인지 오늘따라 색깔이 많이 다르게 보였다.
무렬왕능 뒤로 4기의 고분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보기도 처음이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신라 김씨들의 묘"라고만 안내되어 있었다.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
<국보 제 25 호>선도산 아래에 위치한 신라 제 29대 태종무열왕릉은 원형토분(圓形土墳)으로 둘레 110미터에 높이가 11미터에 이르고, 봉분(封墳) 밑변에 큰 돌을 심어 호석(護石)으로 삼은 형태의 능이다.
★. 비각
★. 이수부분과 귀부분의 색깔이 전혀 다름을 사진상으로도 확연하다.
★.김씨들 4기의 묘 무열왕릉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열왕의 선대가 아니간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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