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단히 말하면 서당은 교육만 하는 기관이고
서원은 교육과 선현을 모시는 일을 한다.
1543년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퇴계선생이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받은 것을 한국서원의 시작으로 한다. 영주 이산서원이나 도산서당 처럼 초창기 서원은 선비를 교육하는 養士기능(강당과 동 서재)이 우세하였으나 1650년 이후 점차 선현을 제향하는 제사기능(존현尊賢)이 강조되고 한 사람을 중복 제향하는 첩설도 많아지고(퇴계 31,송시열 율곡), 문중에서 내세울 만한 사람을 제향하는 문중서원으로 변화해 갔다.
1740년대에 영조는 남설 된 서원을 철폐하였으나, 다시 복원되어 1200개나 되었다고 한다. 일부 서원이 혈연(血緣)·지연(地緣)관계나 학벌(學閥)·사제(師弟)·당파(黨派)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대표적으로 화양동서원의 묵패(사사로운 세금 고지서)는 세금보다 무서웠다고 함)
경향을 띠게(대표적으로 화양동서원의 묵패(사사로운 세금 고지서)는 세금보다 무서웠다고 함)
되면서 서원의 폐해가 커지자,대원군은 1871년에 27개의 서원과 20개의 사우祀宇를 남기고 철폐했다.
이 때 철폐를 피하기 위하여 강당을 없애고 사당만 남기는 유형, 사당을 없애고 강당만 남기는 유형(호계서원), 강당과 사당을 분리 이전하여 철폐를 피하는 유형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1900년 이후 서원으로 복설되는 경우도 있었지만(길안 묵계서원 1895년 향사,임천서원 1908년,청성서원 1909년), 복설하지 못하고 서당형태로 있으면서 제향하는 서당도 생기게 되었다. 서당이 확대 개편되어 서원으로 발전하는 형태(도산서당,풍악서당-병산서원)도 있고 사당이 먼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