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 주관하는 답사도 많이 달라졌다, 버스기사가 몇 시까지 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박물관 대학교에서 나온 안내자는 무엇을 하는지?
15시에 양동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니 15:30분에 출발한다고 한다. 오지를 말던지 왔으면 시간을 주던지 30분안으로 양동을 다 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차는 관가정과 향단만 보고 내려왔다.
옛날에 마을 가운데 교회가 있었서 나가라고 땅까지 마련해 주어도 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손씨의 종부로 부터 들었는데 학교 옆으로 교회를 새로 지었는데 집 모양이 아주 특이했다.
★. 양동초등학교 옆으로 옮긴 교회당
(건물 모양이 교회당으로는 특이하게 생겼다.)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곳으로 추측되며, 경북지방교무서집성에 의하면 여강 이씨인 이광호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고 그의 손서가 된 풍덕류씨 류복하가 처가에 들어와 살아싸. 이어서 이 마을의 경주 손씨 입향조알 일컫는 양민공 손소공(1433-1484)이 540여년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바다 살다가 후에 공신이 되어 rhryks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종손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곡 이번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차녀와 결혼하여 영일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혀7s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야용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면 조선초기까기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충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 마을
마을 입구에서 쳐다보면 왼 쪽의 마을
★. 마을
마을 입구에서 쳐다보면 왼 쪽의 마을
★. 쳐다보면 오른 쪽 부분
★. 쳐다보며 가운데 부분
★. 관가정 보물 442호
청백리인 조선 성종 중종 때 명신 우재 손중돈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손씨 집안의 파종가이다.
마을 입구의 첫 번째 산등성이에 위치했으면서도 옆의 향단보다 눈에 띄지 않지만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은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몸습을 본다는 뜻이다.
★. 관가정 뜰의 향나무와 백일홍
청백리인 조선 성종 중종 때 명신 우재 손중돈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손씨 집안의 파종가이다.
마을 입구의 첫 번째 산등성이에 위치했으면서도 옆의 향단보다 눈에 띄지 않지만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은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몸습을 본다는 뜻이다.
★. 관가정 뜰의 향나무와 백일홍
★. 향단 보물 412호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구조를 가진 아름다운 건물로 회재 이언적선생이 1543년경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둥동임금이 하사하신 집이다. 당시에는 흥자 모양의 99칸이었으나 허물어져 1976년 보수 하면서 56칸으로 줄었다. 외부구조 못지않게 내부구조도 화려하고 세밀하게 고려해서 지은 빼어난 주택이어서 건축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회재선생이 1545년 중앙으로 이임하자 아우 이언괄공이 물려받아서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노모를 모시고 집안을 꾸려가 형의 출사를 도왔는데 그의 손자인 이의주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 이름짓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됨에 따라 여주 이씨의 파종가가 외었다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구조를 가진 아름다운 건물로 회재 이언적선생이 1543년경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해서 둥동임금이 하사하신 집이다. 당시에는 흥자 모양의 99칸이었으나 허물어져 1976년 보수 하면서 56칸으로 줄었다. 외부구조 못지않게 내부구조도 화려하고 세밀하게 고려해서 지은 빼어난 주택이어서 건축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회재선생이 1545년 중앙으로 이임하자 아우 이언괄공이 물려받아서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노모를 모시고 집안을 꾸려가 형의 출사를 도왔는데 그의 손자인 이의주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 이름짓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됨에 따라 여주 이씨의 파종가가 외었다
★. 書百堂 종요민속자료 제 23호
(
이 날은 보지 못 해서 촬영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전에 몇 번 와서 보았습니다.)
안골 중심지에 자리 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이 마을의 입항조라 불리는 양민공 손소공이 성종 15년(1454)에 지은 월성 손씨의 종가집이다. 서백당 또는 송첨이라 부르며 서백당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이다. 집터를 잡아준 풍수가 설창산의 혈맥이 응집된 이 터에 3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나리라 예언했다 하는데 손소공의 둘 째 아들로서 명신이자 청백리인 손중돈선생과 그이 생질이 되는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이 이 곳 외가에서 태어났고 한 분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래서 요즈음도 임신한 딸들이 친정을 오면 서백당에는 재워주지않는다는 말을 몇 년전에 종부로 부터 직접 들었다.
★. 무첨당 보물 411호
1508년에 지은 여강 이씨의 종가로서 별채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은 이언적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오른 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 곳을 방문해 썼다는 竹筆인 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