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의 행보/내가 한일 할일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맷돌

吳鵲橋 2016. 3. 3. 09:17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맷돌


2008년 4월 13일
우리모임은 길가에서 하기로 유명하다. 보통 내가 제일 먼저 나오는데 오늘은 내가 가니 벌써 세 사람이 와 있었고 신선생부군과 차가 보이지않았다. 오늘은 단속이 심해서 도로에 정차를 못해서 뒷동네 가 있다가 8시가 되면 오기로 했다고 한다. 매란국죽회에 성서 홈플러스앞에서 8시정각에 출발하였다. 군위군 소보면 달산리 법주사를 찾으니 생각보다 엄청 큰 법당이 산골에 있어서 눈에 거슬렸다. 산골이면 산골에 맞는 크기의 법당이어야 어울리지 비구니스님 한 분이 마침 김을 메고 있기에 여쭈어 보았더니 아주 귀찮은 듯 맷돌은 있기는 저기 있는데 유래는 모르고 법당은 지은지 오래되지는 않느다고 했다. 요즈음 스님은 엠피쓰리인가를 목에 걸고 이어폰을 꼽고 아마 노래를 듣고 있다고 감정이 흐트러져서 퉁명스런 대답을 한 것 같다.
어쩼든 맷돌을 보니 암수의 크기가 지름이 115센티미터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어 크기는 큰 데 내보기에는 맷돌 같지가 않았다. 맷돌이면 간 물질이 흘러나오는 홈이 있어야 되는데( 암돌이 숫돌보다 커서 숫돌보다 큰 암돌의 둘레에 홈이 있어야 되는데)홈없이 암수의 크기가 똑 같고 딱 붙어 있어 물질을 가는 맷돌과는 다른 형태였다.
달구질 할 때 사용하던 달구가 아닌가 싶다.
네 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은 그 구멍에 줄을 매어서 여러사람이
들었다놓았다 하면서 달구질을 하지않았나싶다.
밖의 작은 맷돌과 비교를 해보고 이상히 생각하고 있는 나
일행 모두가 맷돌이 이상하다는듯 들여다 보고있다.
일반적인 맷돌 에는 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법당을 돌아보니 최근에 크게 지어서 보광명전이라는 간판은 일타스님의 초서 현판이었다. 가끔 일타스님이 쓰신 초서 현판을 보지만 옛날의 절 현판에는 초서가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로는 현판은 초서로 쓰지않는 것으로 안다.)
새로 지은 법당을 지나 올라가니 옛날에 원래 있었던 법당인듯 조그만 전각이 있었는데 그것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았다.
5층석탑이 있었는데 보수를 하면서 잘 못 했는지 어쨌든 이상한 5층석탑을 마주하게 되었다.
3층과 4,5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탑이 이상해서 한참을 보고 있다.
법주사를 뒤로 하고 양암정을 찾으니 네비게에션에 나오지 않고 이정표도 보이지 않아 소보면사무소에 들리니 마침 직원이 있었는데 길을 물으니 가르쳐 주면서 아무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그냥 집 조그만한 한 채가 있다고 했다. 어잿든 안내를 받아 찾아가니 도지정문화재인데 어떻게 이정표도 없을까 하면서 강가에 있는 정자를 찾으니 아주 아름다운 정자였다. 특이한 것은 기둥이 원기둥, 사각기둥, 팔각기둥이 어우러져 있었고 조그만 하지만 팔작지붕으로 주머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기둥이 세가지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할 때는 천지인을 표현한 것 같았다. 원기둥은 천이라고 해서 일반가정집에는 하지 못하게 한 때도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오면서 양반들이 집의 격을 높이려고 한 곳 도 있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앞기둥만 원기둥으로 하고 뒤는 사각기둥한 집들도 많이 있으나 이 집은 팔각기둥까지 하였으니 대단한 배포를 가진 사람이 지은 것 같다. 어쨌거나 사각은 땅을 의미하고 팔각은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 지보사의 5층탑을 보니 고려시대탑 같았는데 4,5층은 보수할 때 만들어 넣은 것이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기록에 5층탑이라고 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보수하는 사람 의미로 5층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영 보기가 싫었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군위 간동에 있는 고기집에서 갈비살과 육회로 소주 한 잔을 하고 점심은 소면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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