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의 행보/내가 한일 할일

인각사, 고운사

吳鵲橋 2016. 3. 13. 10:15



인각사


2015년 1월 19일
팔팔회란?
1988년 경북경산중앙초등학교 3학년담임들의 모임이다
88년도 동학년을 하였다고 팔팔회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10학급이었는데
27년이 지난 지금 나오는 사람은 6사람이다.
다른 곳으로 간 사람도 있고 유명을 달리 한 사람도 있어서다.
이상하게도 승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모두가 교사로 정년을 하였다. 작년도에 마지막 퇴직을 하여서 이제는 모두가 자연인이다.
모임을 처음에는 다방에서 모였다가 다음에는 식당에서 모였다가
어느해인가 그냥 식당이나 다방에서 사용하는 돈이 아까워서 길가에 모이다가 가만히 보니 곁에 동사무소가 있어서 동사무소에 모인다.
모인다음에 목적지를 정한다. 각자 생각해온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날의 목적지를 정하는데
금년 첫 모임은 1월 13일 만촌1동 사무소였는데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나 국제시장의 영화를 보러가자는 사람과 지난헤 못 갔던 의성탐리 조문국유적을 보러가자는 사람으로 나위었는데 날씨도 춥지않으니 조문국을 보러 가기로 하였다.
가다가 군위를 지나게 되어서 인각사를 보고 가자고 하여 인각사를 들리게 되었다.
인각사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307년(충렬왕 33)에 일연(一然 : 普覺國師)이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당시 이 절은 크고 높은 본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앞에 탑, 좌측에는 회랑, 우측에는 이선당(以善堂) 등이 있었고, 본당 뒤에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연은 총림법회(叢林法會) 등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하였다. 시대는 미상이나 조정의 명으로 김용검(金龍劍)이 절을 크게 중건하고 밭 100여 경(頃)을 헌납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총림법회를 자주 열고, 승속(僧俗)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2동의 요사채 뿐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보각국사탑 및 비(麟角寺普覺國師塔─碑)가 있다. 이 탑비는 1153년(의종 7)에서 1155년 사이에 사승(寺僧) 죽허(竹虛)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글자의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그 밖에도 법당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정조탑 앞에는 높이 1.5m의 석불이 있으며, 절 앞 길가에는 만월당(滿月堂)과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을 찾았더니 겨울이라 동파를 방지하기 위한 연탄난로가 설치되어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연탄난로이다.
인각사 발굴 조사 출토부재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연찬가비가 있었다.
산령각이 루처럼 지어졌다.
명부전
극락전앞의 료대

금강산도 식후경

조문국 유적과 유물을 보고나니 12시가 넘어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부근에 식당이 없어서 지인에게 연락을 하니 의성읍을 지나 우보로 가라는 것이다.
가는 길가의 표지판이 미나리라는 말이 나와서 표지판을 따라가니 미나리집이 있어서 미나리와 삼겹살로 점심을 먹엇다. 금년에는 처음으로 미나리를 먹었다.
이 집은 삼겹살 굽는 방법이 특하하다.
캐나다에 갔을 때 바베큐 하던 것처럼 불판을 난로위에 만들어놓고 알미늄 호일을 덮고
그 위에 삼겹살을 얹어서 구워주었다.

사촌마을 만취당을 보러

점심을 먹고나서
양반마을인 사촌마을을 보기로 하였다.
만취당이란 건축물이 유명하다.
그리고 사촌숲은 서애선생이 태어난 곳이란 일화가 있는 유명한 숲이다.
서애선생 어머님이 출산을 하러갔다가 친정쪽에서 큰 인물을 빼앗길 수 없다고 들이지 않는 바람에 숲에서 출산을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어디까지나 일화이다.
사촌마을은 고려말 감목공 김자첨(안동인)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영남사람의 선비정신을 실천하였던 송은 김광수. 퇴계학맥의 큰 줄기를 형성한 만취당 김사원, 김종덕 등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대표적 학자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만취당, 영귀정, 사촌가로숲 등 지정문화재와 전통가옥이 남아 전해오고 있다.
들어서면서 보니 아직 초가집도 있었다.
지방유형문화재 169호로 지정된 만취당은 조선중종때 만취당 김사원이 건축한 것으로 사촌 김씨의 문회 장소로 사용해 오며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사가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 전한다.
만취당은 수리중이라 볼 수가 없었다.
500년 된 만년송이라는 향나무
향나무인데 왜 소나무송자를 사용하였는지를 해설에서도 찾아볼 수 가 없었다.
만취당 전경(전에 답사 때 촬영한 사진)
사촌 숲

고운사

사촌마을을 둘러보고는 고운사로 향햐였다.
일주문을 지나서 다시 일주문 같은 건축물인데
이름은 등운산 조계문이었다.
천왕문
가운루는 기둥이 게곡의 물 흐르는 곳에서 부터 시작한 것이 특이한 건축물이다.
다리위에서 본 가운루
이 중요한 건축물이 시레기 건조장이 되어있어서 안타까웠다.
종각

고운사 2

고운사에는 특별한 건축물이 있다.
사찰에 유교적인 건축물인 연수전이다.
(참고)
기로소
조선 시대,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禮遇)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 1394(태조 3)년에 설치되어 1765(영조 41)년에 독립 관서가 되었고, 이때부터 임금도 참여하였다. 어
어첩
(1) [역사] 예전에, 임금의 명함(名銜)을 이르던 말.
(2) 예전에, 기로소(耆老所)에 보관하는 임금의 입사첩(入社帖)을 이르던 말.
생년월일, 입사 연월일, 어명(御名), 아호(雅號) 따위를 적어 두었다.
명사-왕실 계보(系譜)의 대강을 뽑아서 적은 책.
이곳에 봉안되어있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 하는 것 같다.
유교전축인 삼문이다.
본 건축물인 연수전 현판
연수전 건물
인증샷
삼성각
명부전
약사전
극락전
대웅보전
현판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예쁘게 장식 된 불단
우화루 외벽에 그려진사람이 보는 방향으로 눈이 따라온다는 호랑이
좌청룡
또 다른 건축물에도 호랑이 그림이
고운사 입구에 있는 아름다운 집들
친구들이 함께 출자하여 페교된 터를 사서 지은집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운장장은 커다란 정원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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