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교문화재

청도 자계서원

吳鵲橋 2016. 1. 21. 09:17

자계서원

2008년 11월 8일


★. 산자수려하고 민심이 소박하여 도불습유라는 미풍을 자랑하는 이서국의 옛 터에 자리잡은 자계서원을 찾기는 이 번이 세 번째이다. 두 번은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만 바라보았고
이 번에는 후손인 덕봉교수와 함께 하니 후손 두 분이 나오셔서 우리를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다.
★. 조선조 대학자이며 문신인 탁영 김일손선생을 향사하기 위하여 1518(중종 13)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雲溪서원이라 하였다. 1578년(선조11)에 중건한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자 1615(광해군7)에 다시 짓고 김극일, 김대유를 함께 모셨다. 1660년(현종1) 영남사림들의 상소로 紫溪서원으로 사액 되고 많은 전지와 노비를 하사 받았다.
1871년(고종8)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동재와 서재만 남아 있던 것을 1924년 참봉 김용희가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김해김씨 3현인 절효 김극일, 탁영 김일손, 삼족당 김대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존덕사와 강당인 보인당, 누각인 영귀루와 삼문이 중심축을 이루고 양 옆으로 기숙사인 동재, 서재가 마주보고 있고 제사준비를 하는 전사청 등 12동이 있다.
이 중에 영귀루와 동재, 서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영귀루 옆에는 탁영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500년 세월에도 선생의 기개를 대변하듯이 푸름을 잃지않고 있다.
자계란 말은 1498년(연산군 4) 탁영선생이 무오사화로 화를 당하던 날 천지가 진동하고 벼락이 무섭게 내려치며 갑자기 폭우가 내려 기왓장이 날리고 큰 나무가 부러졌다. 또 선생의 고향 동네 앞을 흐르는 운계천은 핏빛으로 물들고 3일간 거꾸로 흘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운계를 자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안내문
★. 자계서원 현판 (하사현판임)
글씨의 크기가 다른 것은 어명을 받고 글씨를 쓰면 떨리기 때문에 한 자 한 자를
다른 사람에게 쓰게 하여 모은 것이란 설이 있었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나도 모르겠으나 그럴 듯한 말임에는 틀림없다.
★. 강당의 현판
★. 동재의 현판
★. 동재의 기둥은 하나로 된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이 이어 맞추었다
.
★. 서재
★. 사당으로 들어가는 유현문
★. 사당인 존덕사
★. 옛날부터 있던 비각
★. 뒤로 보이는 큰 집이 옛날 부터 있던 비각이고 앞에 작게 보이는 문이 궁문(자동차앞의 작은 문)이라고
하여 참배객들이 자세를 낮추라는 뜻으로 문이 작다고 한다.
★. 영귀루인데 수리(도색)중이라 현판을 떼어놓았다고 한다.
★. 외삼문인 유직문
★. 최근에 건립한 비
이수에 비좌는 대석이니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수를 하였으면 귀부가 맞을 것 같으나 조선시대에는 이런 모양의 비들이 많이 있다.
★. 탁영선생이 심었다는 500년 된 은행나무
나무가 갈라져서 보호대를 했다고 한다.
★. 마을 입구에 있는 하마비


'문화 > 유교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산서원을 다녀오다  (0) 2016.01.21
공부자 성상  (0) 2016.01.21
선비문화체험하다.  (0) 2016.01.21
선비 문화  (0) 2016.01.21
서원과 서당의 차이  (0) 201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