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김성일의 종 가는 김성일이 분가하여 터전을 이룬 북후면 금계리에 있다. 안동 말 로 대개 '금제' 또 는 '검제'라고 발음된다. 학가산 줄기가 감싸고 가운데로 작은 내가 흐르는데, 동편에 학봉종 택을 중심으로 집들이 모여 있고 서편으로는 산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현재의 학봉종택은 1964년 경에 새로 지으면서 옛집의 맛이 없어졌다. 종택 안에 학봉 김성일 기념관인 운장각 (雲章閣)을 지어 보물 제905 호로 지정된 고문서 56종 261 점과 제 906호로 지정된 17종 241점 등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학봉 김성일은 임천서원에서 모시고 있다. 임천서원은 본래 임하면 임하에 있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09년에 안동시 송현동으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그다지 넓지 않은 임천서원 뜰에는 학봉 김성일이 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가져왔다는 '다년초'-요즈음 정원에 많이 심는 맥문동이 사철 푸르게 자란다.
학봉 김성일․서애 류성룡과 병호시비
학봉 김성일은 서애 류성룡과 여러 가지로 얽힌 인연이 깊다. 안동지방의 두 명문대가로서 얼핏보면 서로 대립되는 듯이 보이지만, 당시 이 두 사람은 동문수학한 친우인데다가 왜국에 통신사로도 함께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에도 한 사람은 영의정, 다른 한 사람은 의병장으로 나라를 보전하는 일에 힘썼던 등 공통점이 많다.
김성일(金成一, 1538~1593)은 자가 사순(士純), 호가 학봉 (鶴峯)이며 익호는 문충(文忠)이다. 내앞 의성 김씨 종가에서 청계공 김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568년에 문과에 급제했 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학문이 넓고 깊었는데 의성 김씨 가문에는 그 가학의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성품이 강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직언을 굽히지 않았고, 외국에 사신 으로 가서도 머리를 수그림이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에 왜국에 부사(副使)로서 갔다 돌아온 후 정사인 황윤길과는 달리 왜적이 침범해 올 기미가 없다고 보고하여, 지금까지도 교과서에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학봉은 정사와 부사가 입을 모아 전쟁의 위험성만을 강조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정사와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민심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전쟁의 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준비할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을 추스려 적군에 대항하기를 가장 먼저 했으며, 각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지휘함으로 써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끄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593년에 진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 안동에서는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적군과 의연히 대처한 지사의 면모로 더 잘 알려져 있고, 특히 퇴계의 수제자이자 학맥을 이은 학자로서 존경받고 있다.
이황의 제자들은 1573년(선조 6년) 월곡면 도봉리에 호계서원 을 세워 이황, 김성일, 류성룡을 배향하였다. 그런데 이황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조정에서의 순서가 영의정 다음에 좌의정, 우의정의 차례이듯이 좀더 서 열이 높은 분을 왼쪽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기 때 문에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 에 따라 제자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서애 류성룡 쪽에서는 벼슬로서는 영의정이 더 높으니 서애를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김성일 쪽에서는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것은 단순히 서애와 학봉의 인물이나 학문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서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과 학봉의 사상을 숭상하는 제자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가치평가를 받느냐의 문제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풍산 유씨와 의성 김씨라는 안동의 명문사족간의 세력 견줌이기도 했다.
양쪽의 주장과 세가 팽팽히 맞서 결말이 나지 않자 당시 상주에 있던 우복 정경세에게 판단을 물었는데, 그가 서애 쪽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류성룡을 왼쪽에 모시라고 했다. 시비는 여기에서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세월을 넘어서 다시 이어졌 다.
1805년 영남 유림들이 서울 문묘에 김성일, 류성룡과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 4~1637) 네 분을 종사하게 해달라고 청원을 올리려는데, 누구를 앞에 적느냐에 문제가 생겼다. 이 때 나이순으로 학봉이 앞에 오르니 서애 쪽에서 서열이 잘못 됐다고 따로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이 건 자체를 기각해버렸고 네 분의 문묘 종사가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억울하게 문묘 종사의 길이 막혀버린 정구와 장현광의 제자들이 두 분을 따 로 대구의 이강서원에 모실 것을 결정하자 안동 유림은 이를 규탄하는 통문을 썼다. 이 때 통문의 작성이 학봉 쪽이었던지 이번에도 학봉을 앞에 거명하니 서애파는 다시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200여년 간에 걸쳐 세 번이나 서열이 문제되자, 결국 서애파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서애를 병산서원에 따로 모셔가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이황은 도산서원에, 학봉은 임천서원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갈라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의 시비라고 해서 '병호시비(屛虎是非)'라고 부른다. 그 뒤 모실 분을 잃어버린 호계서원은 사당 없이 강당만 남았다가, 안동댐 건설로 서원 자리가 수몰되게 되자 임하면 임하리로 옮겨가 버렸다.
현재의 학봉종택은 1964년 경에 새로 지으면서 옛집의 맛이 없어졌다. 종택 안에 학봉 김성일 기념관인 운장각 (雲章閣)을 지어 보물 제905 호로 지정된 고문서 56종 261 점과 제 906호로 지정된 17종 241점 등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학봉 김성일은 임천서원에서 모시고 있다. 임천서원은 본래 임하면 임하에 있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09년에 안동시 송현동으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그다지 넓지 않은 임천서원 뜰에는 학봉 김성일이 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올 때 가져왔다는 '다년초'-요즈음 정원에 많이 심는 맥문동이 사철 푸르게 자란다.
학봉 김성일․서애 류성룡과 병호시비
학봉 김성일은 서애 류성룡과 여러 가지로 얽힌 인연이 깊다. 안동지방의 두 명문대가로서 얼핏보면 서로 대립되는 듯이 보이지만, 당시 이 두 사람은 동문수학한 친우인데다가 왜국에 통신사로도 함께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에도 한 사람은 영의정, 다른 한 사람은 의병장으로 나라를 보전하는 일에 힘썼던 등 공통점이 많다.
김성일(金成一, 1538~1593)은 자가 사순(士純), 호가 학봉 (鶴峯)이며 익호는 문충(文忠)이다. 내앞 의성 김씨 종가에서 청계공 김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568년에 문과에 급제했 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학문이 넓고 깊었는데 의성 김씨 가문에는 그 가학의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성품이 강직하여 임금 앞에서도 직언을 굽히지 않았고, 외국에 사신 으로 가서도 머리를 수그림이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에 왜국에 부사(副使)로서 갔다 돌아온 후 정사인 황윤길과는 달리 왜적이 침범해 올 기미가 없다고 보고하여, 지금까지도 교과서에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학봉은 정사와 부사가 입을 모아 전쟁의 위험성만을 강조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정사와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민심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전쟁의 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준비할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을 추스려 적군에 대항하기를 가장 먼저 했으며, 각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지휘함으로 써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끄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593년에 진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 안동에서는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적군과 의연히 대처한 지사의 면모로 더 잘 알려져 있고, 특히 퇴계의 수제자이자 학맥을 이은 학자로서 존경받고 있다.
이황의 제자들은 1573년(선조 6년) 월곡면 도봉리에 호계서원 을 세워 이황, 김성일, 류성룡을 배향하였다. 그런데 이황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조정에서의 순서가 영의정 다음에 좌의정, 우의정의 차례이듯이 좀더 서 열이 높은 분을 왼쪽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기 때 문에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 에 따라 제자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서애 류성룡 쪽에서는 벼슬로서는 영의정이 더 높으니 서애를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김성일 쪽에서는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것은 단순히 서애와 학봉의 인물이나 학문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서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과 학봉의 사상을 숭상하는 제자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가치평가를 받느냐의 문제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풍산 유씨와 의성 김씨라는 안동의 명문사족간의 세력 견줌이기도 했다.
양쪽의 주장과 세가 팽팽히 맞서 결말이 나지 않자 당시 상주에 있던 우복 정경세에게 판단을 물었는데, 그가 서애 쪽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류성룡을 왼쪽에 모시라고 했다. 시비는 여기에서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세월을 넘어서 다시 이어졌 다.
1805년 영남 유림들이 서울 문묘에 김성일, 류성룡과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 4~1637) 네 분을 종사하게 해달라고 청원을 올리려는데, 누구를 앞에 적느냐에 문제가 생겼다. 이 때 나이순으로 학봉이 앞에 오르니 서애 쪽에서 서열이 잘못 됐다고 따로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이 건 자체를 기각해버렸고 네 분의 문묘 종사가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억울하게 문묘 종사의 길이 막혀버린 정구와 장현광의 제자들이 두 분을 따 로 대구의 이강서원에 모실 것을 결정하자 안동 유림은 이를 규탄하는 통문을 썼다. 이 때 통문의 작성이 학봉 쪽이었던지 이번에도 학봉을 앞에 거명하니 서애파는 다시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200여년 간에 걸쳐 세 번이나 서열이 문제되자, 결국 서애파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서애를 병산서원에 따로 모셔가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이황은 도산서원에, 학봉은 임천서원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갈라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의 시비라고 해서 '병호시비(屛虎是非)'라고 부른다. 그 뒤 모실 분을 잃어버린 호계서원은 사당 없이 강당만 남았다가, 안동댐 건설로 서원 자리가 수몰되게 되자 임하면 임하리로 옮겨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