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7일 서예공부를 함께 하는 사람들과 강정보와 육신사를 다녀왔다.
4대강 사업후 처음으로 보 구경을 하였다.
먼저 강정고령보를 보았다.
보이름이 강정보이거나 고령보여야 하는데
두 곳의 지명을 쓴 것은 서로가 양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 쪽은 강정 저쪽은 고령이다 보니 양쪽 이름을 한꺼번에 부쳐서 이름이 네 글자나 되었다. 이런 곳이 또 있다. 대구에서 포항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에도 청통와촌이란 이름이 있다.
이것도 영천 청통과 경산 와촌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두 이름을 동시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양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드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강정에서 고령쪽으로 놓은 다리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은 녹조현상을 일으켜 아주 지저분해 보였다.
내 손전화로 촬영한 것이라서 사진이 선명하지 못하다.
4대강 사업후 처음으로 보 구경을 하였다.
먼저 강정고령보를 보았다.
보이름이 강정보이거나 고령보여야 하는데
두 곳의 지명을 쓴 것은 서로가 양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 쪽은 강정 저쪽은 고령이다 보니 양쪽 이름을 한꺼번에 부쳐서 이름이 네 글자나 되었다. 이런 곳이 또 있다. 대구에서 포항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에도 청통와촌이란 이름이 있다.
이것도 영천 청통과 경산 와촌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두 이름을 동시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양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드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강정에서 고령쪽으로 놓은 다리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은 녹조현상을 일으켜 아주 지저분해 보였다.
내 손전화로 촬영한 것이라서 사진이 선명하지 못하다.
보를 막고 보니 길이 없어진 모양이다. 강위에 다시 다리를 놓아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었다.
엄청난 돈이 들었을 것 같았다. 과연 돈이 든 만큼 효과가 있는지?
10여분 걸어보니 다섯 사람정도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엄청난 돈이 들었을 것 같았다. 과연 돈이 든 만큼 효과가 있는지?
10여분 걸어보니 다섯 사람정도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육신사
(퍼옴)
(퍼옴)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고칠 줄이 이시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1456년 팔다리가 찢기는 거열 죽임을 당한 박팽년의 시조다. 까마귀는 세조, 야광명월은 폐위된 단종을 가리킨다는 것은 세심히 읽지 않아도 바로 파악된다.
까마귀도 폭설을 덮어쓰면 외견상으로는 흰 새가 된다. 하지만 까마귀가 백로로 여겨질 만큼 하얀 새로 환골탈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겨우 비 섞인 눈을 맞을 뿐이다. 언뜻 흰 빛이 비치기는 해도 결국은 타고난 검은 새일 따름이다. 누가 속겠는가.
밤이 오면 홀로 빛나는 밝은 달은 캄캄한 칠흑에도 광채를 잃지 않고 환하다. 해가 진 지 오래되어 한밤중이지만 하늘의 달만은 어두운 줄을 모른다. 오밤중에 뜬 달을 눈으로 보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 달이 바로 님이다. 어찌 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 변동이 있으랴. 흰 척 재주를 부리지만 속이 검은 까마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나는 오로지 일편단심, 내 마음에는 뜨거운 붉은 피가 흐른다.
세종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 연구를 한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 자리에 오르자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다. 마침 성삼문이 이를 목격, 말린 끝에 당일에 죽지는 않았다. 그 후 충청도 관찰사로 근무했는데, 그는 단 한번도 공문서에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
이 사실은 단종 복위 실패 후 세조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드러난다. 세조는 사육신들과 함께 거사를 도모했다가 배신한 김질에게 술을 들려 감옥의 박팽년에게 보낸다.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노라.
박팽년은 이 때 수양을 까마귀에 비유하여 질타한 위의 시조를 노래, 자신의 강인한 의지를 천명한다. 결국 박팽년은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수양이 마지막으로 박팽년에게 말한다.
“너는 나의 신하로서 여러 공문서에도 그 사실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느냐?”
박팽년이 대답한다.
“나는 한 번도 신(臣)이라는 글자를 쓴 적이 없소.”
관찰사로 있으면서 궁궐로 보낸 각종 공문서를 살펴 사실을 확인한 세조는 격노한다. 세조는 박팽년의 팔다리에 네 필의 말을 묶어 달리게 했다. 찢어죽인 것이었다.
죽기 전에 박팽년은 한 수의 시조를 더 남겼다. ‘금이 물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모든 물이 금이 될 수는 없다. 옥이 곤강산에서 난다 하여 세상의 산들이 모두 옥을 낳지는 못한다. 아무리 여자는 남편을 따라야 한다 해도 수준 미달의 남편까지 추종할 수는 없다.’ 세조는 결코 임금이 아니라는 뜻이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인들 님마다 조츠랴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인들 님마다 조츠랴
사육신 유적으로는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마을이 최고다. 감히 다른 곳은 비교할 만한 깜냥이 안 된다. 묘골마을에는 사육신의 직계 후손이 남긴 자취들이 남아 있기 때문.
▲묘골 마을 전경
세조는 사육신의 직계 남자는 모두 죽였다. 박팽년이 죽을 때 그의 며느리 이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대구로 쫓겨와 관청의 노비로 지냈다. 같은 시기에 그녀의 몸종도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조는 며느리 이씨가 사내아이를 낳으면 그 자리에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이씨와 몸종은 같은 날 아기를 낳았다. 이씨는 아들, 몸종은 딸이었다. 몸종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아기를 바꿔 관청을 속였다. 사육신의 직계 남자 자손이 유일하게 세상에 살아남는 순간이었다.
박팽년의 손자는 ‘박비’라는 이름을 썼다. 모두들 ‘박비’가 그의 이름인 줄만 여겼다. 하지만 ‘박비’는 ‘朴婢’였다. 이름 속에 ‘박(朴)씨 성을 가진 노비(婢)’의 뜻을 숨겼다.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어머니’ 몸종은 ‘아들’ 박비와 함께 묘골마을에 숨어 살았다.
뒷날 성종 때 사육신을 새롭게, 높이 평가하는 정치 상황이 조성되었다. 박비는 자수를 했다. 성종은 ‘충신의 자식’이라고 칭찬하며 그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묘골마을의 박씨 집안은 그 후 99칸 기와집을 거느릴 정도로 번창했다.
사육신의 유일한 사내 혈통이 살아남은 묘골마을에 가면 과연 사육신 유적지다운 기운이 느껴진다. 당장 주차장 옆에 번듯한 ‘사육신 기념관’이 있다. 2010년에 문을 열었다.
▲묘골 마을 사육신기념관
▲묘골 마을 충효당
▲묘골 마을 태고정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7대손 숭고가 1644년에 별당으로 지은 충효당, 14대손 문현이 1664년에 지은 도곡재(대구시 유형문화재 32호), 제기도 보관하고 임시 숙소로도 활용하는 숭절당, 외삼문, 손자 박비가 1479년에 직접 지은 태고정(보물 554호), 사육신의 사당이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육각의 비석, 마지막으로 사당인 숭정사가 이어진다.
▲묘골 마을 숭정사 - 사육신 사당
사당의 본래 이름은 숭정사가 아니었다. 박비는 처음 사당을 지으면서 절의묘(節義廟)라 했다. 할아버지인 박팽년, 할아아버지인 박중림을 모셨다.
그런데 5대손 계창의 꿈에 다른 사육신 다섯 분이 나타나 마당을 서성였다. 직계 자손들이 다 죽었으니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 깊이 깨달은 계창은 절의묘를 키워 하빈사(河濱祀)로 새로 짓고 사육신 모두를 모셨다. 그 이후 하빈사는 1691년 낙빈서원이 되었다가 1975년 지금의 육신사 면모를 갖추었다.
묘골마을의 사육신 추모 경내를 보통 ‘육신사’라 부르지만 사당의 이름은 육신사(六臣祀)가 아니다. 여섯 분이 아니라 일곱 분을 모시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칠신사’라 부를 수도 없다. 그래서 성역 전체의 이름은 육신사, 사당의 이름은 숭정사(崇正祀)가 되었다.
숭정사의 성삼문, 아마도 하늘나라에서 박팽년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맙네. 근데 자네만 시조를 남겼나. 내 노래도 한번 들어보게’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따에 났더니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따에 났더니
1. 유응부가 남긴 시조
간밤에 부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 다 핀 꽃이야 일러 무슴하리요
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 다 핀 꽃이야 일러 무슴하리요
2. 이개가 남긴 시조
방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다
저 촛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도다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다
저 촛불 날과 같아여 속타는 줄 모르도다
3. 유성원이 남긴 시조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렸더니
문전의 수성 어적이 잠든 나를 깨와라
태평성대를 꿈에나 보렸더니
문전의 수성 어적이 잠든 나를 깨와라
4.<조선왕조실록>일부… 사육신 처형과 그 유족 처리
세조 4권 2년 6월 7일
박팽년(朴彭年)이 이미 공초(供招)에 자복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세조 4권 2년 6월 7일
박팽년(朴彭年)이 이미 공초(供招)에 자복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팽년·유성원(柳誠源)·허조(許慥) 등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허조·박팽년·유성원의 시체를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어 사방으로 잡아당겨 찢어죽이는 형벌인) 거열(車裂)하고,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고, 시체를 팔도에 전(傳)하여 보일 것이며, 그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세조가) 명하기를,
"친자식(親子息)들은 모조리 (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인)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 등은 극변(極邊)의 잔읍(殘邑)의 노비(奴婢)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하니, (세조가) 명하기를,
"친자식(親子息)들은 모조리 (목을 졸라 죽이는 형벌인) 교형(絞刑)에 처하고, 어미와 딸·처첩(妻妾)·조손(祖孫)·형제(兄弟)·자매(姉妹)와 아들의 처첩 등은 극변(極邊)의 잔읍(殘邑)의 노비(奴婢)로 영구히 소속시키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의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세조 5년 9월 7일
세조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딸 내은금(內隱今)·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었다.
세조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딸 내은금(內隱今)·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