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일 4시 30분에 일어나서 운동 약간 하고 아침 먹고 준비를 마치니 6시 10분 집을 출발해서 큰고개 5거리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대구역에 내리니 6시 35분 밖에 되지않았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서 무엇 하는가 싶어서 가까이 가 보았더니 노인들이 줄을 서서 아침식사를 하려고 한다. 아마 식사하기도 힘든 노인들인가 보다. 그런데 그런 노인들이 왜 이리 많을까? 나는 거기에 비하면 잘 사는 것이다. 오늘 도 이와 같이 문화재탐방을 갈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해도 행복한 것이다.
천천히 신일해피트리 아파트 건설현장입구에 도착하니 6시 45분이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참을 기다리니 갑교 웅길 송교가 오고 조금 있으니 이한방교수 내외가 왔다. 조금 있으니 찬하 인죽이 시간이 다 되어도 오지않아 전화를 하니 시각을 잘 못 알고 있었다. 독촉을 해서 온 것이 7시 20분 차 세대에 나누어탔다. 나는 방율(한의원 원장)의 에쿠스에 웅길과 송교가 타고 남재천 인터체인지에 내리니 서울에서 이인히 가족과 재천의 체욱씨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인희씨가 달걀을 삶아 오셔서 한 개씩 먹고 있는 사이 포항의 류우영씨와 사촌의 한국씨 내외와 안동 김주영씨가 오고 조금 있으니 서울의 류세원씨와 류세정 일행이 와서 차 7대로 출발을 했다. 처음에 간 것이 청풍호의 문화재 (안동댐을 할 때 수몰 된 문화재를 옮겨 놓듯이)였다. 층주댐을 할 때 수몰 될 문화재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이다. 한벽루란 루각과 유물관 고주택등을 보고 아래로 내려가서 옥순봉(대나무와 같이 생긴 바위)과 구담봉(거위와 같이 생긴 바위)을 보고 사인암 (우탁이 붙인 이름)을 보고 그 앞에서 갑교가 점심을 해 와서 닭개장을 데우는 동안 강 건너 가서 보니 조그만 안내판이 있었는데 삼성각에 대한 해설판이었다. 나는 그 해설판이 사인암에 대한 해설판인줄 알고 강건거 갔는데 비가 슬슬 뿌려서 야외에서 식사를 할 수도 없고 날씨도 춥고 해서 이럴 때는 사 먹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의 집(식당을 하지 않는 식당의 마루)에서 식탁을 펴고 돛자리는 차에 실려있는대로 내어서 깔고 하여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전에 이 교수가 맥주를 한 잔 주셔서 날씨 추운데 속이라도 데우자면서 두 잔을 거푸 마시고 조금 있으니 체욱씨가 차를 가지고 소주를 사오셨다. 안주는 포항의 우영씨가 과메기를 제법 많이 가져오셨고 후식으로 사과는 사촌 한국씨가 한 상자를 가져오셨다. 갑교는 안동식해를 해와서 날씨는 춥기나 말기나 푸짐하게 먹고 영월로 가서 장릉을 보고 단종이 사약을 받았다는 관풍헌을 찾는데 한 참을 걸렸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종이 청령포에서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관풍헌은 나도 처음인데 비를 맞으면서 겨우 찾아서 가니 정침에는 약사전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우익사에 관풍헌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객사였다. 다시 청령포로 가니 이미 배표를 팔지않아 의림지로 갔으나 날이 어두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공어가 유일하게 사는 연못이란 것만 알고 다시 곤드레란 비빕밥집을 찾는 데 길을 잘 못 찾은 친구도 있어서 시간이 더 걸렸다. 차가 7대나 되도 보니 자연히 늦어졌다. 곤드레란 나물 이름인 모양이다. 저녁을 먹고 나니 7시 인사를 보이스크우트 악수로서 하고 다음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대구에 오니 10시 반 집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천천히 신일해피트리 아파트 건설현장입구에 도착하니 6시 45분이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참을 기다리니 갑교 웅길 송교가 오고 조금 있으니 이한방교수 내외가 왔다. 조금 있으니 찬하 인죽이 시간이 다 되어도 오지않아 전화를 하니 시각을 잘 못 알고 있었다. 독촉을 해서 온 것이 7시 20분 차 세대에 나누어탔다. 나는 방율(한의원 원장)의 에쿠스에 웅길과 송교가 타고 남재천 인터체인지에 내리니 서울에서 이인히 가족과 재천의 체욱씨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인희씨가 달걀을 삶아 오셔서 한 개씩 먹고 있는 사이 포항의 류우영씨와 사촌의 한국씨 내외와 안동 김주영씨가 오고 조금 있으니 서울의 류세원씨와 류세정 일행이 와서 차 7대로 출발을 했다. 처음에 간 것이 청풍호의 문화재 (안동댐을 할 때 수몰 된 문화재를 옮겨 놓듯이)였다. 층주댐을 할 때 수몰 될 문화재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이다. 한벽루란 루각과 유물관 고주택등을 보고 아래로 내려가서 옥순봉(대나무와 같이 생긴 바위)과 구담봉(거위와 같이 생긴 바위)을 보고 사인암 (우탁이 붙인 이름)을 보고 그 앞에서 갑교가 점심을 해 와서 닭개장을 데우는 동안 강 건너 가서 보니 조그만 안내판이 있었는데 삼성각에 대한 해설판이었다. 나는 그 해설판이 사인암에 대한 해설판인줄 알고 강건거 갔는데 비가 슬슬 뿌려서 야외에서 식사를 할 수도 없고 날씨도 춥고 해서 이럴 때는 사 먹는 것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의 집(식당을 하지 않는 식당의 마루)에서 식탁을 펴고 돛자리는 차에 실려있는대로 내어서 깔고 하여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전에 이 교수가 맥주를 한 잔 주셔서 날씨 추운데 속이라도 데우자면서 두 잔을 거푸 마시고 조금 있으니 체욱씨가 차를 가지고 소주를 사오셨다. 안주는 포항의 우영씨가 과메기를 제법 많이 가져오셨고 후식으로 사과는 사촌 한국씨가 한 상자를 가져오셨다. 갑교는 안동식해를 해와서 날씨는 춥기나 말기나 푸짐하게 먹고 영월로 가서 장릉을 보고 단종이 사약을 받았다는 관풍헌을 찾는데 한 참을 걸렸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종이 청령포에서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관풍헌은 나도 처음인데 비를 맞으면서 겨우 찾아서 가니 정침에는 약사전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우익사에 관풍헌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객사였다. 다시 청령포로 가니 이미 배표를 팔지않아 의림지로 갔으나 날이 어두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공어가 유일하게 사는 연못이란 것만 알고 다시 곤드레란 비빕밥집을 찾는 데 길을 잘 못 찾은 친구도 있어서 시간이 더 걸렸다. 차가 7대나 되도 보니 자연히 늦어졌다. 곤드레란 나물 이름인 모양이다. 저녁을 먹고 나니 7시 인사를 보이스크우트 악수로서 하고 다음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대구에 오니 10시 반 집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남재천 인터체인지에서 마지막 오시는 분(류세원 서울팀)을 기다리는 중 요금소의 차 빠져 나오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모두가 만났으니 반가움에 기념사진 한 장 찰깍 총 24명
한벽루 앞에서 탐방회원들이 한 판 찰깍
한벽루에 올라가니 슬립퍼가 놓였고 마루판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서 신을 벗지않고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한벽루에 올라가니 슬립퍼가 놓였고 마루판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서 신을 벗지않고는 들어갈 수 없었다.
고가의 옛 물건들
1번은 봉새기(봉태기)와 다래끼이고 2번은 도투마리(베를 짤 때 사용하던 물건)
1번은 봉새기(봉태기)와 다래끼이고 2번은 도투마리(베를 짤 때 사용하던 물건)
고가의 가마니와 초석자리 칠 때 사용하던 바디
한벽루에서 내려다 본 청풍호(충주호)
사인암(사인은 고려때 벼슬 이름 역동 우탁이 한 벼슬이며 우탁이 여기서 풍류를 읊었다고 붙여진 이름)
역동 우탁의 기적비
비오는 가운데 남의 집 툇마루에서 정성드려 장만해온 음식을 먹는 중(사인암 앞의 어느 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