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어머니
1912년 1월 26일생 (의성군 단촌면 방화동)
1931년 8월 29일 아버지와 결혼
아들 여섯 딸 다섯 낳았으나 아들 둘과 딸 셋은 일찍이 잃어버렸다.
현재 아들 넷, 딸 둘은 모두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어머님은 글은 한글도 모르셨지만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셨다. 동네 누구 집 제삿날까지 기억하시고 동네 어른들 생일까지도 다 기억하시고 아침이라도 초대받으면 아 누구의 생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100% 맞았다. 역시 남 주기를 좋아하셔서 봇따리 장사가 오면 그냥 보내는 법이 거의 없이 물건을 사주시고 심지어 밥 주고 재워주시기까지 하셨다
심지어 점쟁이까지 집에 재워주셨다. 그래서 가끔 나와는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느 때(중학교 2학년쯤)는 점하는 사람을 집에 모시고 오셔서 쌀을 옥식기(놋쇠로 된 밥그릇)에 가득 담아놓고 홍두깨(국수할 때 사용하는 긴 막대)를 세우는데 점쟁이가 열심히 무엇을 외우면서 세워도 잘 안 서기에 내가 세우겠다고 하니 한번 해보라고 해서 내가 무게중심을 잡고 가만히 있으니 저절로 섰다.
그 이후에는 어머님이 집에는 점쟁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으나 새해가 되면 신수점은 보셨다.
1960년 사범학교를 졸업하였으나 호적상 나이가 만 18세가 되지 못해 발령을 받지 못하고 삼척으로 돈을 벌러 갔었을 때도 어머님은 매일 내가 밥이라도 굶을까 보아 내 몫의 밥을 따로 떠 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였다.
성장해서 23살 봄방학 때 보니 이웃집에서 어머니가 점을 하고 계시기에 내가 가서 신수가 잘 나왔어요. 하니 깜짝 놀라셨다. 내가 점을 못보게 할까보아. 그러나 그때는 나도 철이 들어서 어머니가 하시는 일을 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 제 점 한번 해보세요. 하고 복채를 현금으로 드리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그것(신수점)으로 위안을 삼으시고 가정과 가족들의 평안과 건강을 위하여 연중행사로 하시는 일이라서 우리 집뿐만이 아니고 그 시절에는 정월이 되면 어디서 오는지 용하다는 점쟁이들이 동네에 와서 점을 해주고 곡식을 복채로 받아갔다. 동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느 한 집에 모여서 점을 보는 시대였던 것 같다.
내가 성장해서 직장을 가졌을 때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일일이 동네어른에게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주셨다. 예를 들면 누구 집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빈소에 가서 인사드리라고 하셨다.
돌아가신 분에게까지 인사드리라고 했으니 살아계신 분은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 했다.
내가 인사를 잘하는 이유는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인사만은 철저히 지도해주셨기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님은 자식을 위하여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셨던 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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