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16일 피난을 갔다.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을 하러 학교에 가다가 산 넘어 폭탄 떨어지는 소리에 온 동네 사람들이 뒷산으로 달아나서 한 참을 기다리다가 내려왔다. 학교는 물론 가지 않았었다.
다음날 피난을 간다고 봇따리봇따리 싸놓고 있었는데 다음날 새벽에 공산당의 땅콩총(인민군 장총) 소리가 들려서 모두 잠을 깨었는데 바로 뒷산에서 공산군 7인이 우리 옆집(막내 할아버지댁)으로 와서 오촌(당시 중학생)을 데리고 건너편 콩밭으로 가는 것을 보고 피란은 남으로 가지 못하고 동녁골로 갔는데 그날 저녁 젊은이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아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어디론가 가셨는데, 작은아버지는 그 날 오셨는데 아버지는 오시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들으니 할머니 산소에 인사를 드리고 남쪽으로 간다는 것이 잘못 길을 들어 아군과 적군 사이에 있게 되었으나 다행히 국군 쪽으로 가까워서 국군의 심부름을 하다가 남쪽으로 피난을 혼자 가시게 되어서 우리 식구와는 두 달 동안 떨어져 살았다. 두달 동안 이산가족이 되었었다.
음력 8월 15일 국군이 우리 마을을 회복하고 9월 초순쯤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다 떨어진 가방 한 개를 메고 오셨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에 사신 분이다. 당신의 행복은 챙기지 못하시고 자식들 뒷바라지 하는데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아버지가 51세 되던 여름 방학 때
방학이라 집에 와 보니 아버지의 상장이 있었다.
전국한시대회 입상이었다.
아버지 상 타셨네요 하였더니
그래 이제 너희들이 공부를 다 하였으니
나도 공부 좀 하련다고 하셨다.
그 이후 아버지는 가끔 전국한시대회에 가까운 안동이나 의성 같은 곳에는 직접 참석을 하셨고 서울이나 부산처럼 먼 곳은 우편으로 보내셔서 제법 여러 곳의 대회에 상을 타신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한시집을 만드시다가 편찬을 못하시고 유고만 남아있다. 그 유고는 내가 가지고 있는데 누구에게 서문을 부탁하시려고 서문자리를 비워놓으셨는데 내가 못나서 서문을 부탁도 못해보고 발간도 하지 못한 채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다.
6남매 중 남자 넷은 그래도 고등학교까지 다 마치게 하셨으나 한 여동생은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을 시키셨고 한 여동생은 중학교를 졸업시키신 자식들의 교육만은 철저히 하신 분이다.
내가 지금도 컴퓨터나 책을 읽는 버릇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언제나 건강할 것만 같던 아버지도 1987년 봄에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내가 경산중앙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는데 토요일마다 영천에 중풍을 잘 다스리는 한방병원이 있다고 해서 그 병원에 들려서 약을 지어서 올라갔었으나 별로 차도가 보이지 않았었다. 수족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셨고 말씀을 하시지 못하였다. 글을 쓰라고 해보면 비뚤비뚤 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주일마다 올라갔으나 차츰 회 수가 줄어져서 2주일에 한 번 3주일에 한 번 이렇게 올라갔으나 회복을 시키지는 못하였다. 동네 어른 분들도 장병(오랜병)에 효자 없네. 이제는 올라오지말게나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으니...이런말도 들어가면서도 게속 아버지를 보살펴드려야했다.
내가 형제들중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결국 아버지는 회복을 못하시고 3년이 지난 1990년 겨울에 서울 막내동생집에서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