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28일 금요일 아침 일찍 (06;20)집을 나섰다. 박물관 주차장에 드러서자마자(06:45) 차의 대수를 헤아려보니 7대였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몇 호차인가를 확인하니 4호차였다. 내가 엽서를 받자마자 입급을 했는데도 4호차였다. 얼마나 사람들의 동작이 빠른지 우선 좌석을 잡을려고 차에 오르니 거의 찼다. 이리저리 둘러보니 앞에서 두 번째 좌석 한 자리가 비어있어서 미리 탄 분에게 여쭈어 보니 다행히 좌석이 있어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와서 생각해보니 얼마나 일찍들 왔기에 벌써 좌석이 없을 정도인가? 할 일 없는 사람이 많기는 많다.
07:05출발을 해서 황간휴게소에 쉬고 마곡사에 도착하니 10시 반이었다. 들어가는데 일주문이 보여서 차가 서려나 했는데 일주문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속으로 일주문에서 거리가, 멀리 사찰 건물이 있겠구나 그러면 일주문은 최근에 만들었겠구나. '일주문을 절 가까이 만들던지 일주문을 만들었으면 일주문안으로는 차를 통과시키지말던지 하지'라는 혼자 생각을 하면서 사찰에 도착하니 사찰구조가 특이했다. 우선 강(마곡천)의 양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들어가면서 보니 종각모양이 특이했다. 十모양으로 지었는데 종은 신라종의 형태를 하였으나 최근에 만든 것이고 북, 목어 운판 이렇게 사물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는 금고가 더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본전인 대웅보전의 안내판을 보니 본전이라고 되어 있었으며 봉안된 불상은 석가모니, 약사여래, 아미타불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불상의 수인은 모두 아미타수인이었다. 다시 내려와서 대광보전의 안내판을 보니 여기도 본전이라고 되어있었다. 한 사찰에 본전이 둘 인 것도 처음 보는 일이다.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없듯이 한 사찰에 본전은 한 곳이어야한다.)안에 들어가보니 불상(비로자나물 독불)은 정문을 향하고 있지않고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영주태백산부석사의 무량수전처럼) 독불일 때는 그냥 대광전이나 대적광전 하면 되는 것으로 아는 데 현판과는 안 맞는 것 같다.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은 서방정토의 극락세계를 표현하다보니 서쪽에 봉안 한 것으로 아는데 여기는 비로자나불을 봉안 했는데 역시 서쪽에 봉안 되어있었고 불상의 뒤를 비어 둔 것은 탑돌이처럼 불상을 돌 수 있도록 한 것 같았다.
불상 뒤에는 해수관음도의 탱화가 있었고 그 옆의 바닥을 들서보니 낡은 삿자리가 있었는데 백년전에 앉은 뱅이가 와서 백일 기도를 드리면서 짯는데 마지막날 일어섰다고 하였다. 기념으로 두고 있다고 해설이 되어 있었는데 제목에는
"백일기도 드리면 참나무로 엮은 삿자리"로 되어 있고 내용을 읽어보니 '대광보전 내부에 지금은 카페트가 깔려있지만 들춰보면 정교하게 엮은 돗자리를 볼 수 있다" 삿자리와 돗자리는 다른데 어떻게 갑자기 삿자리가 돗자리로 변해버렸다.
나오면서 5층탑은 보니 특이했다. 해설을 읽어보니 중국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탑이라하며 상륜부(붉은 동그라미)는 절병통같았으며 그 위에 조그만 일산을 쓰고 있는 듯 하였다. 기단(하늘색 사각형)은 상하의 크기가 비슷했다.
삿자리
상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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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마동이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면 광택이 마치 불처럼 이글거린다는 구리'라는 뜻이란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면 광택이 마치 불처럼 이글거린다는 구리'라는 뜻이란다
인도. 중국 우리나라 세 곳에만 있다고 한다.
영산전의 현판을 보니 세조어필이란 낙관이 뚜렷이 보였다. 그러나 안내서에는 세조친필이라고 되어있었다. 신경을 덜 쓴 탓일까? 유명한 서예가의 글씨가 여러 점 있었다. 해강 김규진의 마곡사. 표암 강세황의 대광보전.송하 조윤형의 심검당, 그리고 나오다 일주문의 현판을 보니 여조 김응현의 글씨였다.
몽고반점 나무로 사진 작가들이 이 나무를 많이 찍는다고 한다.
매표소 안의 작은 다라를 지나서 오른 쪽에 있음
11시 30분에 마곡사를 출발하여 공주박물관에 다다르니 12시였다. 박물관 대학 총회를 한다고 모이는데 나는 야외박물관을 돌아보니 설명과 문화재가 맞지않는 것이 여러 점 있었다. 공익근무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이 때 까지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읽어보니 그렇다고 하였다.
무령왕을 보니 모형이었다. 몇 년전에는 실물에 직접 들어갈 수 있었는데 관람객이 많아져서 5년전에 모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산성으로 옮겨 점심을 먹는데 오후 2시였다. 모두가 배가 한 창 고픈데 식당에 들어가니 반찬 네 종류만 댕그러니 놓여 있었다. 밥 나오기를 기다리니 200명정도의 밥이 언제 나올지 몰라 반찬을 먼저 먹었다. 반찬 다 먹고 나니 밥이 나오고 밥 다 먹고 나니 국이 나왔다. 그래서 내가 이 때 까지 가장 별식을 먹었다고 했다. 그래도 뱃속에 들어가면 썪일테니 무슨 관계야 있겠나? 오후 2시 50분 공산성의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 번에는 "당시에 구마나리"라고 했다는 문맥이 있어 나 혼자 생각해보니 당시(523년)가 아니고 일제시대에 일본사람이 구마나리라고 했지 않을까 싶다. 일본말로 곰이 구마이니까. 마곡사의 안내판에는 "의자왕 3년 자장율사가 지었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자장율사가 백제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하더니 혼자 중얼거리면서 아침에 해설자의 말씀으로 "우물이 있는데 연지라고 한다"는 사전 설명이 석연찮아 가서 확인하니 우물이 아니고 처음부터 연지였는 것 같았다. 금서루를 지나서 쌍수정에 이르니 민흘림 기둥인데 기둥 하나가 거꾸로 되어있었다. 관심음 가지고 복원을 하지않고...
오후 네시 거기서 출발을 해서 대구 집에 도착하니 오후 7시반이었다. 안내판을 기록하는 사람들 제발 주의하여 기록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공산성에서 연지를 지나서 얼마를 가니 젊은 두 분이 공사를 하고 있는 데 석빙고 같아서 석빙고는 경상도에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여기도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물어보니 '잠빙고'라고 했다. 나는 잠빙고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누에고치의 종자를 보관하는 장소라는 설명 하면서 현황사진과 잠종냉장고 수축공사 설계도 1부를 주었다. 그러면 그렇지 석빙고는 경상도에만 있는 것인데...
0.공산성의 금서루
매표소에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나오는 성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