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2005년 등록 된서원수는 913개로이다.
그 이후에 새로이 등록 된 서원도 있을 것이다.
514개가 경상도에 있으니 경상도(경남,부산,경북,대구)는 서원 천국이다.
그래서 조선선비 반영남 영남선비 반 안동이란 말이 있었는지 모른다.
서원의 향사는 왜 정일에 지내는지 아직 모르겠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으나 아직 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 이후에 새로이 등록 된 서원도 있을 것이다.
514개가 경상도에 있으니 경상도(경남,부산,경북,대구)는 서원 천국이다.
그래서 조선선비 반영남 영남선비 반 안동이란 말이 있었는지 모른다.
서원의 향사는 왜 정일에 지내는지 아직 모르겠다.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았으나 아직 답을 얻지 못하였다.
전국의 향교 수는 234곳이다.
鄕校史
고구려 소수림왕 二년(三七二)에 수도에 太學을 세웠다 하는데 고구려의 鄕學이 가장 빠르게 설립되었다 해도 이전으로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향학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堂이 있었음은 분명한데 태학이 漢武帝時의 五경박사를 둔 태학과 같은 성격이 분명한 반면 讀書 習射하였다는 경당이 꼭 이같은 유교적 성격의 향학이었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방도 중앙의 학문성향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당의 교과내용도 태학과 同類도 경당이 우리나라식 최초의 향교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을까 한다. 백제나 신라에 고구려의 경당과 같은 향학이 있었음은 어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없으나 추론컨데 三국이 경쟁하는 시대이므로 二국에도 어떤 형태로든 없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통일신라 때에도 某種의 향학이 있었을 것이라 사료되나 문헌상 고증할 수 없다.
고려에 들어와 成宗 六년(九八七)에 전국 十二牧(경기도 楊州, 廣州, 충청도 忠州, 淸州, 公州, 경상도 晋州, 尙州, 전라도 全州, 羅州, 昇州(=順天), 황해도 海州, 黃州)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를 배치하고 州郡에 學舍를 세웠다 하는 바 향교에 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이라 할 것이다. 다시 仁宗 五년(一一二七)엔 각 州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다. 다시 忠肅王 六년(一三一四)엔 李穀을 모든 州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조선초에 들어와 태조는 원년(一三九二)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 그 지역 수령의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향교 설치를 강조하였다. 이어 七년(一三九八)에는 성균관의 설립과 더불어 향교의 설치를 재차 촉구하였다. 태종은 향교의 修學 성과를 수령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삼고 十三년(一四一三)엔 각 향교에 향교의 관리 및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토록 學田을 지급하는 등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함에 거의 州縣마다 고루 一개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성종 十五년에 三○○여개소로 늘어났다. 향교 儒生의 在學 연령은 十七~四十세였으나 燕山君 이후 四十세 이상도 재학하여 연령상한선이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府, 牧 향교의 유생은 九十명, 도호부 향교의 유생은 七十명, 군 향교의 유생은 五十명, 현 향교의 유생은 三十명이 定員이었다.
그러나 임진, 정유 왜란과 정묘, 병자 호란을 거치는 동안 국가 재정이 피폐하고 失政이 거듭되므로써 향교의 기능 또한 점차 약화되었다.
고려에 들어와 成宗 六년(九八七)에 전국 十二牧(경기도 楊州, 廣州, 충청도 忠州, 淸州, 公州, 경상도 晋州, 尙州, 전라도 全州, 羅州, 昇州(=順天), 황해도 海州, 黃州)에 학교를 설치하고 경학박사를 배치하고 州郡에 學舍를 세웠다 하는 바 향교에 관한 가장 확실한 기록이라 할 것이다. 다시 仁宗 五년(一一二七)엔 각 州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진작시킬 것을 명하였다. 다시 忠肅王 六년(一三一四)엔 李穀을 모든 州에 파견하여 향교를 부흥케 하였다.
조선초에 들어와 태조는 원년(一三九二)에 각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 그 지역 수령의 능력을 가늠하는 제도를 수립하고 향교 설치를 강조하였다. 이어 七년(一三九八)에는 성균관의 설립과 더불어 향교의 설치를 재차 촉구하였다. 태종은 향교의 修學 성과를 수령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삼고 十三년(一四一三)엔 각 향교에 향교의 관리 및 유지에 충당할 비용을 마련토록 學田을 지급하는 등 더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함에 거의 州縣마다 고루 一개씩 향교가 설치되어 전국의 향교는 성종 十五년에 三○○여개소로 늘어났다. 향교 儒生의 在學 연령은 十七~四十세였으나 燕山君 이후 四十세 이상도 재학하여 연령상한선이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府, 牧 향교의 유생은 九十명, 도호부 향교의 유생은 七十명, 군 향교의 유생은 五十명, 현 향교의 유생은 三十명이 定員이었다.
그러나 임진, 정유 왜란과 정묘, 병자 호란을 거치는 동안 국가 재정이 피폐하고 失政이 거듭되므로써 향교의 기능 또한 점차 약화되었다.
一九一○년 日帝 强占후 향교는 교육기능과 재산을 탈취당하고 근근히 존속하였다. 一九五○年六月 전쟁으로 다시 수많은 향교가 전부 혹은 부분 파손을 입었고 이후 지금까지 각 지역 유림들의 눈물어린 노력으로 거의 다 복원하고 있다.
향교는 學制上 중등학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그 교육내용의 수준으로 볼 때 교육과정이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成均館에 비해 반드시 낮은 것은 아니었으나,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小科에 합격해야 하고, 향교의 生徒는 대부분 小科에 응시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있었으므로 향교는 성균관에 비해 하위단계의 교육기관이었다. 또 교육내용면에서 볼 때 향교는 순수한 儒學 교육기관이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있어서 정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고급행정직을 유학으로 수양된 인재로 충당하였고, 향교는 유학 위주의 文科시험을 위한 준비기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중앙의 四學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一차 과거에 합격한 생도는 生員, 進士의 칭호를 받고 다시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리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교가 과거 준비장으로 되고 私學機關인 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해졌으며, 一八九四년(고종 三十一)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이름만 남아 文廟를 享祀할 따름이었다.
一九九五년 현재 전국의 향교수는 二三四개소인데 북한 소재 향교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우니 참고삼아 一九三○년대 자료에 의한 북한 향교는 다음과 같다.
① 경기도 성균관 및 二개 향교(신자 수 九四五명) : 성균관(開城), 長湍, 開豊
② 강원도 七개 향교(신자 수 六六五○명) : 淮陽, 通川, 金化, 金城, 平康, 伊川, 安峽
③ 황해도 二十개 향교(신자 수 三一, 二九一명) : 海州, 延安, 白川, 金川, 兎山, 平山, 新溪, 甕津, 長淵, 松禾, 殷栗, 安岳, 信川, 文化, 載寧, 黃州, 鳳山, 瑞興, 遂安, 谷山
④ 평안남도 二十三개 향교(신자 수 一六六一八명) : 平壤, 順川, 孟山, 陽德, 成川, 江東, 中和, 龍岡, 江西, 永柔, 安州, 价川, 德川, 寧遠, 三登, 三和, 祥原, 肅川, 順安, 殷山, 慈山, 甑山, 咸從
⑤ 평안북도 二十一개 향교(신자 수 一六六三九명) : 義州, 龜城, 泰川, 雲山, 熙川, 寧邊, 博川, 嘉山, 定州, 郭山, 宣川, 鐵山, 龍川, 朔州, 昌城, 碧潼, 楚山, 渭原, 江界, 慈城, 厚昌
⑥ 함경남도 十六개 향교(신자 수 二○, 三七二명) : 咸興, 定平, 永興, 高原, 文川, 德源, 安邊, 洪原, 北靑, 利原, 端川, 新興, 長津, 豊山, 三水, 甲山
⑦ 함경북도 十一개 향교(신자 수 一三,八○○명) : 鏡城, 明雲, 吉州, 城津, 富寧, 茂山, 會寧, 鍾成, 穩城, 慶源, 慶興
해방 이전 파악된 북안 지역 소재 향교 수는 총 一○一개 향교로 당시 향교에 소속된 신자수는 一○六, 三一四명이었는데 참고로 당시(一九三○년대) 전국 유림의 총 수는 二二七, 五四六명이다.
현 二三四개 향교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창건년대 순으로 정리하면 또한 다음과 같다.
慶州향교의 경우 신라 신문왕 二년(六八二) 國學으로 창건되고 고려시대 향학으로 되어 향교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移建했다는 기록이 없는 바, 兄山江 상류 평야중의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천연의 성곽과 같은 現 향교자리가 신라 국학자리라 여겨진다.
寧海향교의 경우 신라 신문왕 二년(六八二) 芍芝山 南麓하에 국학으로 설립된 뒤 一 三四六년(忠穆왕 一) 掌書記 李天年이 대성전과 동.서○를 건립하고 향교라 칭하였다 한다.
晋州향교의 경우 九八七년(성종 六) 鄕學堂으로 창건되어 국자감으로부터 경학 및 醫學박사를 파견 授講토록 하였다. 一○一一년(현종 二) 書齋를 중건하고 修學院-學舍-書齋-四敎學堂 등으로 개칭하였다.
一三九八년(태조 七년)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성균관으로부터 훈도, 교관, 교수 등이 파견되었다 한다.
강원도 鐵原의 경우 왕건이 궁예의 태봉국 관직에 있을 때 살던 옛 집터에 설치됐던 사실은 있으나(설치연도 불명) 그후 병화로 인하여 소실된 후에는 다시 중건하지 아니하였다 하고 그러다 一五六八(선조 一)에 이르러 철원 유림들이 철원읍 월하리에 신건하였다 한다.
麗水의 경우 고려 태조 二十三년(九四○) 여수부가 설치됨에 동북쪽 二리밖 大谷동(세칭 향교동)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一○一八년(현종 九) 순천에 예속되었고 충정왕(一三五○~一三五二)때 여천현으로 독립되었다가 조선초 다시 폐현되었다. 一八九七년 여수군이 부설되면서 여수군내 유림이 鍾鼓山 기슭에 대성전과 동.서무를 건립하였다 한다.
扶餘의 경우 백제의 고도로서 향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백제 聖王 十六년(五三八) 공주에서 수도를 부여로 옮겨온 뒤인 삼국시대 말엽경으로 추정한다 한다.(신라 경주와 마찬가지로 백제국학부터 말하는 것 같다) 당초 부여읍 舊校里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淸州의 경우 고려 성종 六년(九八七) 전국 十二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때 養性하게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로는 조선 태조년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외의 향교들을 창건년대별로 분류하면, 고려중기(一二五九년)까지 二十二곳(앞의 七곳 포함), 고려말(一三九一년)까지 三十곳, 조선조(태조년간)까지 七九곳, 定宗년간에 二곳, 태종년간에 五二곳, 세종년간에 二十一곳, 이후 조선조 中期(一六八三년)까지 八곳, 高宗년간에 五곳, 一九六五年 이후 현재까지 三곳(창건 연대 미상이 十곳)으로 총 二三四개이다.
향교는 學制上 중등학교기관이라 할 수 있다. 그 교육내용의 수준으로 볼 때 교육과정이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成均館에 비해 반드시 낮은 것은 아니었으나,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小科에 합격해야 하고, 향교의 生徒는 대부분 小科에 응시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있었으므로 향교는 성균관에 비해 하위단계의 교육기관이었다. 또 교육내용면에서 볼 때 향교는 순수한 儒學 교육기관이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있어서 정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고급행정직을 유학으로 수양된 인재로 충당하였고, 향교는 유학 위주의 文科시험을 위한 준비기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향교는 중앙의 四學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一차 과거에 합격한 생도는 生員, 進士의 칭호를 받고 다시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리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교가 과거 준비장으로 되고 私學機關인 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해졌으며, 一八九四년(고종 三十一)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이름만 남아 文廟를 享祀할 따름이었다.
一九九五년 현재 전국의 향교수는 二三四개소인데 북한 소재 향교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어려우니 참고삼아 一九三○년대 자료에 의한 북한 향교는 다음과 같다.
① 경기도 성균관 및 二개 향교(신자 수 九四五명) : 성균관(開城), 長湍, 開豊
② 강원도 七개 향교(신자 수 六六五○명) : 淮陽, 通川, 金化, 金城, 平康, 伊川, 安峽
③ 황해도 二十개 향교(신자 수 三一, 二九一명) : 海州, 延安, 白川, 金川, 兎山, 平山, 新溪, 甕津, 長淵, 松禾, 殷栗, 安岳, 信川, 文化, 載寧, 黃州, 鳳山, 瑞興, 遂安, 谷山
④ 평안남도 二十三개 향교(신자 수 一六六一八명) : 平壤, 順川, 孟山, 陽德, 成川, 江東, 中和, 龍岡, 江西, 永柔, 安州, 价川, 德川, 寧遠, 三登, 三和, 祥原, 肅川, 順安, 殷山, 慈山, 甑山, 咸從
⑤ 평안북도 二十一개 향교(신자 수 一六六三九명) : 義州, 龜城, 泰川, 雲山, 熙川, 寧邊, 博川, 嘉山, 定州, 郭山, 宣川, 鐵山, 龍川, 朔州, 昌城, 碧潼, 楚山, 渭原, 江界, 慈城, 厚昌
⑥ 함경남도 十六개 향교(신자 수 二○, 三七二명) : 咸興, 定平, 永興, 高原, 文川, 德源, 安邊, 洪原, 北靑, 利原, 端川, 新興, 長津, 豊山, 三水, 甲山
⑦ 함경북도 十一개 향교(신자 수 一三,八○○명) : 鏡城, 明雲, 吉州, 城津, 富寧, 茂山, 會寧, 鍾成, 穩城, 慶源, 慶興
해방 이전 파악된 북안 지역 소재 향교 수는 총 一○一개 향교로 당시 향교에 소속된 신자수는 一○六, 三一四명이었는데 참고로 당시(一九三○년대) 전국 유림의 총 수는 二二七, 五四六명이다.
현 二三四개 향교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창건년대 순으로 정리하면 또한 다음과 같다.
慶州향교의 경우 신라 신문왕 二년(六八二) 國學으로 창건되고 고려시대 향학으로 되어 향교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移建했다는 기록이 없는 바, 兄山江 상류 평야중의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천연의 성곽과 같은 現 향교자리가 신라 국학자리라 여겨진다.
寧海향교의 경우 신라 신문왕 二년(六八二) 芍芝山 南麓하에 국학으로 설립된 뒤 一 三四六년(忠穆왕 一) 掌書記 李天年이 대성전과 동.서○를 건립하고 향교라 칭하였다 한다.
晋州향교의 경우 九八七년(성종 六) 鄕學堂으로 창건되어 국자감으로부터 경학 및 醫學박사를 파견 授講토록 하였다. 一○一一년(현종 二) 書齋를 중건하고 修學院-學舍-書齋-四敎學堂 등으로 개칭하였다.
一三九八년(태조 七년)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성균관으로부터 훈도, 교관, 교수 등이 파견되었다 한다.
강원도 鐵原의 경우 왕건이 궁예의 태봉국 관직에 있을 때 살던 옛 집터에 설치됐던 사실은 있으나(설치연도 불명) 그후 병화로 인하여 소실된 후에는 다시 중건하지 아니하였다 하고 그러다 一五六八(선조 一)에 이르러 철원 유림들이 철원읍 월하리에 신건하였다 한다.
麗水의 경우 고려 태조 二十三년(九四○) 여수부가 설치됨에 동북쪽 二리밖 大谷동(세칭 향교동)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一○一八년(현종 九) 순천에 예속되었고 충정왕(一三五○~一三五二)때 여천현으로 독립되었다가 조선초 다시 폐현되었다. 一八九七년 여수군이 부설되면서 여수군내 유림이 鍾鼓山 기슭에 대성전과 동.서무를 건립하였다 한다.
扶餘의 경우 백제의 고도로서 향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백제 聖王 十六년(五三八) 공주에서 수도를 부여로 옮겨온 뒤인 삼국시대 말엽경으로 추정한다 한다.(신라 경주와 마찬가지로 백제국학부터 말하는 것 같다) 당초 부여읍 舊校里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淸州의 경우 고려 성종 六년(九八七) 전국 十二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보내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 때 養性하게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로는 조선 태조년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외의 향교들을 창건년대별로 분류하면, 고려중기(一二五九년)까지 二十二곳(앞의 七곳 포함), 고려말(一三九一년)까지 三十곳, 조선조(태조년간)까지 七九곳, 定宗년간에 二곳, 태종년간에 五二곳, 세종년간에 二十一곳, 이후 조선조 中期(一六八三년)까지 八곳, 高宗년간에 五곳, 一九六五年 이후 현재까지 三곳(창건 연대 미상이 十곳)으로 총 二三四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