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의미로는 불교와 관련되는 모든 상, 즉 부처의 상을 비롯하여 보살상·천부신장상(天部神將像)·명왕상(明王像)·나한상(羅漢像) 등이 포함된다.
불상의 도상
불상 /불상의 명칭도
부처의 형상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나서 불교의 진리를 깨달아 전파하고 열반한 지 약 500여 년이 지난 1세기경부터이다. 그 이전 약 2세기 동안은 부처의 전생과 일생 이야기, 그 가르침과 관련되는 내용이 연화·보리수·법륜·불탑·금강좌 등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부처의 존재는 신체 중 발바닥을 표현한 불족적(佛足跡) 정도이고 사리(舍利)는 부처의 진신(眞身)을 상징하는 것으로 숭앙되었다.
부처를 인간의 형체를 빌어 표현할 때 보통 인간과 구별되는 초인간적인 신체적 특징이 크게는 32가지, 작게는 80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32길상(吉相) 80종호(種好)라고 부른다. 그중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는 머리 위에 혹같이 튀어나와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肉X), 머리카락이 짧고 꼬부라진 나발형(螺髮形), 이마 한가운데에 있는 긴 털로 과거 및 미래를 비쳐볼 수 있는 능력을 상징하는 백호(白毫) 등을 들 수 있다. 불상의 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데 옷(佛衣 또는 法衣)은 기본적으로 제일 겉에 입는 대의(大衣), 그 안에 입는 내의(內衣), 치마인 군의(裙衣) 3종류가 있다. 대의를 걸쳐 입을 때는 두 어깨를 덮는 방식의 통견(通肩)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 위로만 걸쳐 입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이 있다. 또 몸의 자세에 따라서 입상·좌상·의상(倚像:두 다리를 내리고 있는 것)·와상(臥像:누워 있는 것) 등이 있다. 손 모양은 그 부처의 성격을 알려주는데 이를 수인(手印) 또는 인상(印相)이라고 부른다. 수인의 종류에는 오른손을 위로 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두려워말라는 뜻의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을 밑으로 하여 소원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여원인(與願印),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켜 지신(地神)에게 부처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법륜을 돌려 불법을 설교하는 전법륜인(轉法輪印) 또는 설법인(說法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일체라는 뜻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쥐는 지권인(智拳印) 등이 있다. 부처의 머리나 몸 뒤에는 두광(頭光)이나 신광(身光) 또는 이 둘을 합친 형태의 거신광(擧身光)을 달아 장엄하게 하고 연화대좌·방형대좌·사자좌 위에 앉거나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불상은 홀로 표현되면 단독상, 양 옆에 협시보살이 있으면 삼존불상, 여기에 양쪽에 나한상을 더하면 오존불상이 되며 그외에 천부신장상이나 공양자상 등이 첨가되어 군상(群像)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불상의 종류
■ 불타
모든 법의 진리를 깨닫고 중생을 교화하여 이끌어주는 부처로 불(佛) 또는 여래(如來)라고도 한다. 부처의 이름에는 그 역할과 가르치는 내용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인간세상에 태어나
고행을 몸소 실천하여 불법의 진리를 깨달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석가족의 성자로서 석존(釋尊)이라고도 부른다. 석존 이전의 과거에도 부처가 있었는데 과거7불이라 하며, 석존 열반 후 56억 7,000만 년 후인 미래에 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구제를 기약한 부처는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한다. 불교에서의 삼세불(三世佛)이란 과거불·현재불·미래불을 말하며 흔히 정광불·석가모니불·미륵불을 가리킨다. 한편 대승불교의 불신관에 의한 삼신불(三身佛)에는 인간세상에 태어난 석가모니불인 응신불(應身佛), 인간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여러 정토를 다스리는 부처, 예를 들어 서방정토에 사는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동방 유리광정토(瑠璃光淨土)의 약사불(藥師佛)인 화신불(化身佛), 불법의 진리 자체를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집합체로 본 모든 부처의 으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인 법신불(法身佛)이 있다.
■ 보살
부처를 도와서 현재 자비를 행하며 중생교화에 힘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불(成佛)의 뜻을 품고 보리(菩提:깨달음)를 탐구하는 자를 말하며 대승불교에서는 부처 다음으로 중요한 예배대상이다. 여러 종류의 보살상 중에 미륵보살은 현재 도솔천에서 보살행을 하고 56억 7,000만 년 후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3번 설법하여 석존의 업을 계승할 미래의 부처이다. 관음(觀音)은 자비의 보살로 대세지(大勢至)보살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로 표현되며 특히 여러 가지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위력이 있어 일찍부터 독립된 상으로 예배되기도 했다. 지혜제일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살행의 실천자인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석가모니불 또는 비로자나불의 협시로 표현되기도 하며, 일광(日光)·월광(月光) 보살은 약사불의 협시로 등장한다. 보살상은 부처와 달리 몸에 영락(瓔珞)으로 화려한 장식을 하는데 이는 보살이 수행의 결과 얻을 수 있는 도(道)의 경지를 장신구를 통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상체에는 옷을 입지 않는 대신 천의(天衣)를 걸치며 아래에는 군의 또는 상의(裳衣)라 불리는 치마를 입는다. 머리는 틀어올리거나 양 어깨로 늘어뜨리고 보관을 쓰며 목걸이·팔찌·영락 등으로 몸을 치장한다. 손에는 연꽃·정병·보주와 같은 지물을 들고 있으며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는 경우에는 관음보살의 도상적 특징이다. 보살상의 자세는 입상·좌상·교각상(交脚像:두 다리를 교차하여 앉은 것)·반가상(半跏像:의자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얹어 놓은 것)·유희좌(遊戱坐: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얹지 않고 느슨하게 구부린 것)·윤왕좌(輪王坐:한 발을 구부려 세운 것) 등 다양한데 보살상은 자세나 어떤 그 도상이 특히 유행하는 시기가 있다.
■ 천부신장
부처의 권속(眷屬) 중에서 불법을 받들어 불교세계를 수호하는 천부의 여러 신이다. 즉 인도에 불교성립 이전에 있던 브라만교의 최고신인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불국토를 사방에서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 성역(聖域)의 입구를 지키는 인왕(仁王) 등이다. 범천과 제석천은 일찍 불교에 받아들여져 불법수호신이 되었으며 석가삼존의 양협시로 삼존형식의 선구가 되었다. 형상은 일정하지 않지만 보통 중국식 복장을 하고 손에 불자(拂子)와 금강저(金剛杵)를 각각 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활·칼·창 같은 무기를 들고 있다. 인왕은 흔히 벗은 상체 위에 천의를 두르고 팔을 들어 힘을 자랑하는 역사(力士)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번뇌를 무찌르는 상징적인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있어 금강역사라고도 부른다. 또한 천부신장상 중에는 여러 민간신앙의 신들이 불법에 교화되어 불교수호의 역할을 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있는데 역시 갑옷을 입고 돌 위에 서 있으며 머리에는 용이나 사자 같은 관을 써서 그 속성을 나타낸다. 이밖에도 불국토의 장엄과 부처의 위용을 강조하는 비천상, 부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보리를 구하고 법을 전파하는 나한상·조사상(祖師像) 등이 있다. 불교의 교리가 밀교적인 내용으로 변하면서 명왕상(明王像)이 등장하는데, 이는 여래의 뜻을 받들어 현신하여 악을 파괴하는 교령륜신(敎令輪身)으로 갑옷을 입고 분노의 형상을 하며 머리와 손이 여러 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불상 중에는 이 밀교의 명왕상으로 알려진 예가 없다.
불상의 역사
■ 인도
불상이 제작되기 이전 불교와 관련된 여러 상징적인 예배대상을 숭배하던 때를 무불상표현시대라고 하며, 1세기경 인도의 쿠샨 시대부터 불상표현시대라고 한다. 이때에는 부처의 전생을 이야기한 본생담이나 일생의 여러 중요한 사건과 그 가르침을 알리는 불전도(佛傳圖)가 회화나 조각으로 표현되었으며, 불족이나 빈의자 또는 사람이 타지 않은 말 등으로 석존의 존재를 알리던 자리에 인간모습의 부처형상이 나타난다. 당시 인도 서북부 간다라(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부지역과 파키스탄 북서부지역) 지방에 퍼진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부처의 신상 표현에 자극을 준 것으로 생각되며,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도 중북부 마투라 지방에서도 그 이전부터 전해오던 토착신앙의 예배대상 표현의 전통 위에 불상이 출현했다. 간다라 불상의 특징은 소조나 회색 편마암을 주로 사용해 서구적인 불안(佛顔)에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이다. 마투라 불상은 붉은색에 흰 반점이 있는 사암질의 재료를 사용해 얼굴표정을 엄격하게 표현하고 신체묘사에서도 내면적인 정신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인도불상은 불교문화의 절정기인 굽타 시대에 이르면 사색적이고 엄숙한 불안에 균형잡힌 불신과 완벽한 조각솜씨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불상표현이 이루어진다. 마투라 지역에서는 간다라 조각과 쿠샨 왕조부터 내려오는 마투라 조각양식이 융합되어 일정한 굵기의 융기된 옷주름을 몸에 꼭 달라붙는 듯이 조각하여 신체적인 양감과 정신적인 내면성을 강조했다. 반면에 사르나스 지방에서는 옷주름 표현이 없어지고 팽팽한 불신에 꼭 달라붙는 옷은 긴장감이 도는 조형성을 보여주며, 불법 자체가 불상 전체에 응결된 집합체로서의 신성한 느낌을 강조했다. 굽타 왕조 이후 팔라 시대의 불상은 지역적으로 인도 동북부 뱅골 지방에 집중되었는데 그 양식은 굽타 조각의 전통이 좀더 도식화되고 장식적으로 흐른 것이었다. 또한 힌두 미술이 융성함에 따라 밀교적인 요소를 흡수한 도상이 발달하여 카슈미르·네팔 등으로 전파되었으며 12세기말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문화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인도 남부의 아마라바티와 스리랑카는 불교전파 초기부터 불상이 만들어졌으며 그 영향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어 굽타 시대 이후에는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북으로는 동서무역의 길목이던 서역의 오아시스 지역을 거쳐 중국의 둔황[敦煌]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서역의 불상은 인도·이란 및 서역 특유의 지역성이 반영된 양식이 발달했으며,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이 혼합된 외래요소는 다시 중국적으로 변모하면서 다양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 중국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후한시대인 1세기경이다. 유물상으로 나타나는 불상은 후한 말기의 강소성 마애불상군도 있으나 초기에는 대부분 동경(銅鏡) 뒷면이나 도자기 장식, 고분 내의 부조 등 중국 전통적인 미술의 일부로 채택되는 정도였다. 4세기경부터는 5호 16국의 북방호족들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독립된 불상이 제작되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불상은 후조(後趙)의 건무(建武)4년명금동불좌상(338)이다. 5세기 후반까지의 중국 불상에는 인도나 서역의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었으나 6세기에는 중국적인 면모가 뚜렷해진다. 중국의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데에는 석굴사원의 조성과 그 속에 봉안된 불상의 변천이 매우 중요하다. 대표적인 석굴사원과 그 조성연대를 보면 대략 둔황의 천불동은 5세기에서 원대에 이르기까지, 병령사(炳靈寺)는 5세기, 맥적산(麥積山)은 6세기에서 송대, 운강(雲岡)은 5세기 후반, 용문(龍門)은 5세기말~8세기, 천룡산(天龍山)은 6~8세기 안에 조상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이러한 석굴사원의 불상을 통해 지역과 시대에 따른 다양한 불상 표현과 양식적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석굴사원은 대부분 중국 북방에 치우쳐 있으며, 한문화의 전통이 강한 남방에서는 조상(造像) 활동보다는 불전(佛典)의 학문적 연구에 더 큰 공헌을 했다. 불상양식도 북방은 강직하고 예리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데 비해 남방은 대체로 부드럽고 환미감이 넘치며 중국적인 전통성이 많이 수용된 양식이었음을 사천성 성도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석굴사원 외에 서안 보경사(寶慶寺)의 탑에 부조된 8세기초의 삼존불, 십일면관음상 등이 있으며 그외에도 많은 금동불상, 돌로 된 단독상, 비상(碑像) 들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당(唐) 후기에는 선종(禪宗)이 발달하면서 불상제작이 쇠퇴했으나 강남지역의 사천성에 있는 요·송·원대의 석굴사원인 대족석굴(大足石窟)과 항주에 있는 원대의 비래봉(飛來峰) 석굴 안에 많은 불상이 남아 있다.
■ 한국
우리나라 불상양식의 발달은 시대에 따라 다른 특성을 보여주는데 대체로 그 변화는 중국의 불상양식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4세기말 불교가 고구려(372)와 백제(384)에 전해진 이후 불상이 만들어져 예배되었으나 현존하는 예들은 대부분 6세기 이후의 불상이다. 5세기초로 추정되는 금동불좌상이 뚝섬에서 발견되었으나 북위양식이 강하여 중국의 전래품으로 생각하는 견해가 강하다.
고구려 불상의 대표적인 예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539 추정)에 북위양식이 반영되어 있듯이 6세기의 고구려 불상은 북위 내지 동위의 영향을 받아 강직하고 예리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6세기의 상으로는 평양 원오리에서 출토된 소조불·보살상이나 평천리출토 금동반가상이 전한다. 한편 7세기에 속하는 상은 별로 중요한 것이 없는데 이는 불교가 왕실에서 크게 세력을 유지하지 못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백제 불상의 대표적인 예는 부여 군수리사지 납석제불좌상과 금동보살입상인데 같은 시기의 고구려 불상과 형식면에서 연관성을 보이지만 둥글고 부드러운 조형성은 중국 남조의 상과 비교된다. 예산의 사면석불이나 태안의 마애삼존불은 6세기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600년 전후의 대표적인 상인 서산마애삼존불에는 중국 수대의 조각양식이 반영되어 있지만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조각수법과 인간미가 넘친다. 불교를 가장 늦게 공인한 신라(527)는 공인 직후에 흥륜사를 지었으나 6세기의 불상으로 남아 있는 예는 없다. 다만 566년 황룡사를 완성하고 574년 금당에 금동장륙존상을 모셨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듯 현재 금당지에 남아 있는 거대한 대좌를 통해 당시의 불상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신라의 초기 불상으로는 단석산 신선사지에 있는 마애불상군, 경주인왕동출토석불좌상, 경주배동삼존석불입상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북제·북주·수나라의 불상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반가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국보 제78호 및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당시의 정교한 조각솜씨와 뛰어난 주조기술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다. 특히 국보 제83호는 일본 교토[京都]의 고류 사[T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유사하여 당시 한·일 간의 불교문화 교류의 밀접한 연관성을 증명해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문화의 전성기로 불상 표현의 기술이 최고 수준에 이르고 종교적인 뒷받침으로 위엄있고 이상적인 불상이 조성되었다. 중국 당과 일본 나라[奈良]의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와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신라의 불상은 국제적이면서도 신라적인 불상양식으로 발전했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은 7세기 후반의 군위 팔공산 삼존불, 경주 사천왕사지 녹유 사천왕상(679), 감은사지 3층석탑 금동사리함 외벽의 사천왕상(682), 경주 구황동 3층석탑 내 사리함과 함께 출토된 순금불상 2구(692, 706) 등을 들 수 있다. 이 상들은 7세기말에 이미 뛰어난 주조기술과 조각수법으로 전성기 통일신라의 조각양식이 어느 정도 성립되었음을 보여주며, 중국 불상과의 양식 비교에서도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8세기 불상 중 대표적인 예인 719년의 감산사지석조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은 새로 수용된 불·보살 양식의 신라적인 토착화 과정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의 걸작품은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불상군이다. 불상·보살상·천부상·나한상 들이 항마촉지인의 본존을 중심으로 원형석굴 내에 불국토(佛國土)를 이루고 있는데, 이 상들은 뛰어난 비례와 조화의 균형미를 보여주며 간결하면서도 부드럽게 조각되었다. 숭고한 종교적인 정신성이 섬세한 기법의 조각과 융합된 이 석굴암 불상군은 신라 불교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후 석굴암 본존불 형식의 불상은 9세기에 유행하는 지권인 비로자나불좌상 형식과 함께 신라말 고려 초기로 이어지면서 표현 양식에 지역성이 가미되면서 다양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고려시대에도 역시 불교문화가 발달하여 여러 지역에서 불상이 제작되었다. 신라말 고려초에 제작된 강원도 강릉지방의 보살상들, 원주·광주·충주 지역의 철조불상, 충청도의 관촉사·대조사·개태사 석불과 같은 거석불(巨石佛)들, 경상북도 지역의 신라불상의 전통을 이어주는 상들은 고려 초기의 다양한 불상양식을 보여주며 중국의 오대·요·송의 불상 요소도 일부 보인다. 고려 후기의 충청남도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1346년경 복장(腹藏)기록에 있는 문수사의 금동아미타불좌상은 14세기 고려 불상의 중요한 예이다. 한편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티베트계 라마 불상의 요소를 반영하는 상들도 보이는데 금강산 회양출토의 금동관음보살상이나 조선초의 불상·보살상에도 그 영향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그 이전에 비해 대표적인 불상이 별로 없지만 수종사탑에서 나온 불감 속의 금동불좌상(15세기 후반)이나 1628년에 봉안된 불상들을 들 수 있다. 또한 용문사(1684)·남장사·실상사(1782) 등에 전하는 목각탱들은 조선 말기에 형식화되어 가는 불상양식의 일면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