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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도동의 일본식 집

吳鵲橋 2017. 5. 20. 07:01



1962년 3월2일부터 8월 31일까지 이집 2층에서 숙식을 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이영관씨 집이었고 딸만 둘이었는데 5학년과 3학년으로 기억되는데 가정교사를 하였기 대문이다. (나는 당시 울릉초등학교 근무)

아래 사진과 글은 풍류하회에 있는 것을 복사해왔다.




(좌)다다미방 3개가 연속되고 있다. 왼쪽의 도코노마는 깔끔한 것이 도시풍이다. (우)역사 자료를 전시한 가옥 내부

절해고도였던 울릉도에 대한 기록
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은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 역사를 후세에 전하는 교육장의 역할을 할 수 있어 2006년 3월 등록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됐다. 이 집은 단순한 일본식 가옥이라기보다 울릉도 주거사의 한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약 2천 채에 이르렀던 가옥 중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어 건축물 자체로도 값지다.
일제강점기 때 사람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동해의 한가운데인 절해고도(絶海孤島)로 인식했다. 하지만 오늘날 울릉도는 우리에게 매우 가깝고 아름다운 이웃 섬으로 다가온다. 여객선이 울릉도 선착장에 도착하면 육지의 항구 같은 친근감이 든다. 부두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풍성하고 왁자지껄하다. 대부분은 독도를 가기 전에 울릉도를 들른다. 여기서 숨 고르기를 하는 것이다.
1882년(고종 19년) 음력 5월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1833~1901)이 울릉도를 조사해 보고한 지도와 일기가 남아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한국인 140명, 일본인 78명이 재주(在住)하고 있으며, 1883년 3월 동남제도개척사로 임명된 김옥균(1851~1894)은 이 절해고도를 개척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고 한다.
1884년에는 러시아인과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울릉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896년에 러시아가 원시림이 울창한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탈취했으며,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원시림을 남벌했다. 1904년부터는 어획벌목(漁獲伐木)이 본격화됐다. 일본인 어부, 목수 등이 풍부한 어장과 울창한 삼림을 노리고 몰려들었다.

울릉도에서 가장 오래된 일본식 가옥
1930년 전후, 울릉도에는 한국인 1만여 명이 살고 있었으며 일본인의 수는 무려 4~5백 명에 달했다. 그즈음 도동리에는 근대적 의미의 항구가 열렸다. 내륙에서 오는 우편선과 여객선의 왕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항구 초입 중심 거리에 일본식 주택, 상점 등 건축물이 들어섰다. 그곳이 현재의 도동항이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한 건물이 우리를 맞이한다. 오랫동안 가로주택(街路住宅: 도로변에 지은 주택)으로 쓰였던 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이다.
울릉군에서는 이곳이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라는 점에 관심을 두었다. 대부분의 일본식 집은 적산(敵産)이라는 이름으로 차츰 노후되어 철거의 수순을 밟았다. 그 속에서도 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은 해방 후 여관으로 쓰였으며 2008년까지는 개인 주택으로 활용됐다.
1910년대 세워진 이 집은 울릉도에 들어와 목재 벌목·제재(製材)업자이자 고리대금업을 했던 사카모토 나이지로(坂本來次郞)가 지은 일본식 주택이다. 도동리에서 제재소를 운영하던 그는 건축과 목재를 직접 다룰 수 있어 집을 짓기에 더욱 용이했다. 솔송나무와 참나무 등이 사용됐고 목수는 일본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주택의 건립 연대는 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가 1917년에 찍은 사진으로 보아 1910년대 초로 짐작된다.

일본식 특징이 고스란히 남은 내외부 구조
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은 도로변 대지면적 150평 정도(506㎡)에 목조 2층(건축면적 128.02㎡, 연면적 188.02㎡)의 비교적 큰 주택이다.
1층은 편복도식으로 안방과 서재, 부엌을 두었으며 남쪽에는 툇마루를 배치했다. 생활 편의상 큰 방의 일부는 1954년 온돌로 개조하면서 변형했다. 목조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고, 계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방을 통해야 한다. 작은 방과 큰방 사이는 토벽으로 마감했다.
2층은 다다미방 3개가 ‘一’ 자로 배치되어 있다. 벽 한쪽에 족자를 걸고 바닥에 인형이나 꽃꽂이로 장식하는 도코노마(床の間)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두 장의 판자를 아래위로 어긋나게 댄 일본식 선반이 눈에 띈다. 방 사이의 문지방 위에 통풍을 위한 창인 란마(欄間)는 훼손되었으나 내부 장식의 대부분은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북측에는 침실을 두었고, 일본식 벽장에 수납공간을 마련했다. 울릉도 귀목 이불장과 향나무로 된 옷장도 잘 보존되어 있으며, 천정은 솔송나무를 썼고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외관 벽은 미국식 목재비늘판벽, 지붕은 함석지붕으로 소유자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각 창틀 옆에는 빗물을 방지하기 위한 비막이(아마도, 雨戶)와 문담기(아마도부쿠로, 雨戶袋)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은 폭풍우와 폭설 재해가 잦아 건축물은 그에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1934년 폭설은 집을 주저앉힐 정도여서 골격과 외피를 연결하는 것이 집 지키기의 관건이었다.
이 주택은 이제 지어진 지 100년이 되었다. 우리 주거사의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건물이다. 현재 문화재청 소유로 2008년 이래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관리하고 있다. 독도박물관과 함께 울릉도 역사자료관으로 계속 기능하길 바란다.

글+사진‧김정동(우리근대건축연구소)

문화재청  작성일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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