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의 행보/글씨

서산선생님의 서실을 찾았다.

吳鵲橋 2015. 11. 28. 21:13

서산선생님 서실을 찾았다.

오랜만(2008년 12월 13일)에 선생님서실을 찾았다.
6회 개인전을 2008년 12월 7일까지 봉산 문화관에세 하셨다. 그 때 가서 못 뵈왔고 작품도 한 점 사 주지 못하여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조그만 선물을 준비해서 찾았다. 가는 길에 대구초등하교 현관을 들렸다. 선생님의 글씨 한 폭이 걸려 있었기에 보려고 갔으나 지금은 없어져버렸다. 선생님서실을 찾으니 서실 현판은 옛날 그대로였다. 1층은 세를 주고 2층은 서실이고 3층은 주택이다. 선생님은 서실에 계실 것이나 우선 3층으로 올라갔다. 사모님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만나보려고 2층에 올라가니 맥주병이 10개 이상 있었다.요즈음도 술을 많이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으로 3층에 올라가니 막내 따님만 있었다. 선물을 전달하고 선생님을 물으니 지금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모님도 나가시고 그러더니 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알긴 하겠는데 이름은 모르겠다며 어머님께 전화를 해서 바꾸어 주었다. 내 이름을 대니 곧 들어갈테니 기다리라는 것이다. 서실에 내려오니 하빈서 오셨다는 스님 한 분이 글씨를 쓰실 준비를 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원생들이 오늘은 선생님이 쉬시는 날이라 오지 않는 것 같았다.(어제가 토민선생 전시회개장일이니 술 하실 것을 알고) 스님과 몇 마디 말을 주고 받고 있으니 사모님이 오셔서 손을 잡고 반가워 하시면서 차를 내어 오셨다. 선생님의 근황을 물으니 술을 전에보다 더 많이 하시고 어제 토민의 전시회 개장식에 갔다가 밤새 마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주무시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내선배,도무열)이 있을 때는 술판이 벌어지면 선생님보다 나이가 더 든 우리가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선생님만 남겨 놓으니 혼자서는 그렇게 많이는 마시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혼자서도 집에서 마시는 것이 중독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말려도 되지않고 그러다가 죽는다고 말하면 죽으면 되지해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밤새도록 먹을 갈면서 텔레비젼 틀어놓고 담배를 다섯 갑이나 피우고 술은 옆에 달아놓고 있어서 걱정이라는 것이다. 아마 나를 기다리게 한 것도 누구에게 하소연 할 곳도 없어서 나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손수 먹을 밤새 간다는 것은 벼루가 엄청 크다 대만에서 가져오신 벼루인데 그 때 당시 350만원 주었다는 것인데 지름이 50센티미터쯤 되는 자연석 벼루이니 밤새 갈어야 된다.) 그리고 선생님에게서 당시 1억 5천만원 호가하는 벼루도 구경하였다. 일본 사람이 사려고 왔는데 안 팔았다는 것이며 명품벼루 목록에도 나와 있고 한다 그러나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는 모른다. 벼루 크기는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사방으로 난정서의 글 내용에 나오는 회계산음의 정경을 각하여놓은 벼루이다. 책도 엄청 많다 원장실의 정경도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안 계서서 원장실 사진은 찍지 못하였다.
★. 서실 현판 (나무판에 선생님이 직접 쓴 글씨이다)
해볕이 복초까지 비쳐서 하얗게 되었다. (復初軒書會)

★. 서실 밖에 있는 술병들

★. 서실의 사물함

★. 회원들의 붓걸이
나도 옛날에 여기에 붓을 걸오놓았다.

★.선생님의 작품

★. 전주의 강암 송성룡선생의 작품
서산선생님도 강암선생님을 좋아하시고 강암선생님도 서산을 좋아하셨다.
서산선생님 1회 전시회때 전주서 일부러 서산선생님의 작품을 보시고 격려말씀을
대구까지 오셨는데 그 때 같이 밥 한 끼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상투를 틀고 백고무신을 신고 다니시던 분이시다.

★. 전서의 기본 획 긋기를 하고 계시는 스님
나오려고 할 때 회원 한 분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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