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13일 적다
★할아버지 너에게는 증조부
본관- 海州 (17世孫)
시조-仁裕(고려조 군기감)
입향조-國華(按撫使) 시조의 9세손
입향조의 후손들은 徵士公(징사공)파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말씀 10원을 웃는 자는 10원에 울 때가 있다.
할아버지는 한 글도 한 자도 모르시던 분이시다.
1892년 6월 2일 (호적상) 동녁골(내가 살던 곳에서부터 오른쪽 계곡으로 1KM 쯤 더 들어간 10여호되는 작은 마을)이라는 태어나서 일만 하시다가 1977년에 돌아가셨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키가 크지 않으셨는지 모른다.
키는 1M 60CM도 안 되는 조그만 체구였지만 일은 큰 체구를 가진 사람보다 더 잘 하셨다
풀을 베어 놓으면 단단하여 풀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0. 돈은 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모으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을 모은 후에는 관리하고 보관하고 자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어야한다.
2006.9.13
0. 할머니-안동 권씨 (너에게는 증조모)
1890년8월4일생 일직면 광연동에서 출생
1950년 2월 3일 사망 (음력으로는 1949년 12월 9일이 정확하다. 내가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제사도 그 날 지냈고 아마 호적상은 사망신고가 늦은 것 같음)
환갑을 못하고 돌아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 것 같다.
할아버지가 글을 모르니 할머니도 글을 모르시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 때 당시로는할머니는 키가 아주 크셨다. 할아버지 보다 더 크셨으니까. 할아버지 4형제 중 할머니로서는 가장 크셨다.
무엇이든지 남 주기를 좋아하셔서 거지가 지나가면 그냥 못 계시고 밥을 주셨고 동냥하러 온 거지에게는 곡식을 바가지에 듬뿍 주었다. 마음이 참 좋은 분이셨다. 한 집에 여럿이 살다보니 나는 늘 할머니 곁에서 잤다.
할머니는 9남매를 나으셨다.
첫째는 여자이고 아버지(너에게는 할아버지)가 둘째이시다.
아들이 둘 딸이 일곱인데 지금 살아계신 분은 막내(오순이 71세)로서 묵호에 살고 계신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대구에도 살아계셨는데 돌아가신지가 한 3년 된다.
그러나 6.25전쟁이 나기 바로 전에 돌아가셔서 빈소가 그대로 있었다.
아버지는 권(상주가 쓰는 삼베로 된 모자)을 쓰고 피란은 가야만 했다.
아버지 -吳道洙 18世孫 (너에게는 조부님) 1913년 출생
현대 교육은 받으시지 않았지만 한학을 하셔서 한글은 자연히 깨우치신 분이시다. 동네의 행사는 늘 주관을 하셨고 명절(설)이 되면 토정비결을 보러 오시는 동네분들이 많이 계셨다. 의학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동네에 아픈 분이 계시면 물으려 오셨고 약도 지어주셨다. 화재(약 짓는 재료를 적은 것)라는 것을 써 주셔서 건재약방에 가서 약을 짓도록 하셨다. 농사일은 잘 못 하셨다 그래서 매우 힘들게 농사를 지으셨다.
논갈이 같은 것을 잘 못 하셔서 늘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약이나 사돈지(결혼하면 사둔에게 쓰는 편지)를 써 주실 때 돈을 받으라고 농사일 때 논 갈아 달라고 하니 돈 안 받더냐라고 말씀 드렸으나 한 번도 돈을 받으시는 것을 보지 못 했다.
어떤 특별한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지만 늘 웃는 얼굴로 계셨다. 어머님이 어떤 잔소리를
하셔도 그냥 웃으시기만 하신 인자한 분이셨다.
교육은 어떻게 공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냥 비료포대(비료를 넣었던 종이포대)종이라고 비료를 다 쓰고 나면 그 종이를 펼쳐서 漢자 몇 자를 붓으로 적어 놓으셨다.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누구보고 쓰라고도 안 하시고 그냥 적어 놓으시면 대개 내가 붓으로 쓰곤 했다. 한 장을 다 쓰면 다시 새로운 종이에 적어놓으셨다. 그래서 아마 내가 글씨를 잘 쓰게 된 것 같다. 이것이 아버지 교육 방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약 40년동안 교육에 종사한 나 보다도 아버지 교육방법이 더 훌륭하신 것 같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언제나 책을 읽고 계셨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으셨지
손님이 오시면 사랑방에 모셔놓으시고 자식을 불렀다. 누구라도 보이는데로 그러면 반드시 손님에게 인사를 올리게 하시고 집의 둘째일세 하고 소개를 해주셨다. 그러면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술상이 들어오면 받아서 술 따르는 시중을 드렸다. 술상이라야 막걸리에다가 김치 안주이지만 손님이 오시면 꼭 술상은 차렸다.
이러니 예절은 자연히 몸에 베이게 된 것이다.
0. 본분을 지켜라.(특별히 말씀은 안 하셔도 아버지가 해 오신 것으로 보아 이런 뜻을 가지신 것 같았다.)
0.어머니 金玉伊 (너에게는 할머니)
1912년 1월 26일생 (의성군 단촌면 방하동)
1931년 8월 29일 아버지와 결혼
아들 여섯 딸 넷을 나았으나 아들 둘과 딸 둘은 일찍이 잃어버렸다.
현재 아들 넷 딸 둘은 모두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어머님은 글은 한글도 모르셨지만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셨다. 동네 누구 집 제삿날까지 기억하시고 동네어른들 생일까지도 다 기억하시고 아침이라도 초대받으면 아 누구의 생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100%맞았다. 역시 남 주기를 좋아하셔서 봇다리 장사가 오면 그냥 보내는 법이 거의 없이 물건을 사주시고 심지어 밥주고 제워주시기까지 하셨다 심지어 점쟁이까지 집에 재워주셨다. 그래서 가끔 나와는 의견이 맞지 않는 때도 있었다. 어느 때(중학교 2학년쯤)는 점하는 사람을 집에 모시고 오셔서 쌀을 옥식기(놋쇠로 된 밥그릇)에 가득 담아놓고 홍두깨(국수할 때 사용하는 긴 막대)를 세우는데 점장이가 열심히 무엇을 외우면서 세워도 잘 안서기에 내가 세우겠다고 하니 한 번 해보라고 해서 내가 무게중심을 잡고 가만히 있으니 저절로 섰다. 그 이후에는 어머님이 집에는 점장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으나 새해가 되면 신수점은 보셨다. 성장해서 23-4살 때 보니 이웃집에서 어머니가 점을 하고 계시기에 내가 가서 신수가 잘 나왔어요 하니 깜짝 놀라셨다. 내가 못하게 할까보아. 그러나 그 때는 나도 철이 들어서 어머니가 하시는 일을 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 제점 한 번 해 보세요 하고 복채를 현금으로 드리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그것(신수점)으로 위안을 삼으시고 가정과 가족들의 평안과 건강을 위하여 연중행사로 하시는 일이라서 우리집뿐만이 아니고 그 시절에는 정월이 되면 어디서 오는지 용하다는 점장이들이 동네에 와서 점을 해주고 곡식을 복채로 받아갔다. 동네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느 한 집에 모여서 점을 보곤 하였다.
내가 성장해서 직장을 가졌을 때 방학이 되어 집에 오면 일일이 동네어른에게 인사드리라고 가르쳐 주셨다. 예를 들면 누구 집 어른이 돌아가셨으니 빈소에 가서 인사드리라고 하셨다.
돌아가신 분에게까지 인사드리라고 했으니 살아계신 분은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했다.
내가 인사를 잘 하는 이유는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인사만은 철저히 지도해주셨기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님은 자식을 위하여서는 무슨일이라도 하셨던 분 같았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기차역까지(6KM) 우산을 가지고 마중을 오신 분이다. 우산이라야 종이우산이라고 바람이 조금만 불면 뒤로 뒤집어져서 쓰도 못하게 되지만 당신은 우산보다 한 단계 낮은 삿갓이라는 것을 쓰시고 어떤 때는 비를 다 맞으시면서 자식 비 맞을까보아 6KM를 비속에 걸어오셨다. 그러니 벌써 옷은 다 저졌었어도 우산을 나에게 주시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물론 나도 그 종이우산을 쓰고 집에가면 옷이 다 졌는다.
그래도 천으로 만든 우산 없다고 투덜대곤 하였다. 다른 집 아이는 천으로 된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았으니 물론 떼도 써 보았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침등교할 때는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비가 올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요즈음은 어쩐 일인지 이런 어머님 생각이 자주 나곤 한다. 지금 생각해보아야 아무런 쓸 데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
어머님은 무식하셨지만 자식들을 바르게 교육시키시고 자식 잘 되라고는 몸을 아끼시지 않는 분이었던 것 같다. 내가 기억력이 좋은 것은 아마 어머님을, 글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버님을 닮은 것 같다.
★. 아버지
이름 오상인(吳相寅)
생년월일: 1943년 3월 2일 (호적상)
실제로는 경진생 1940년 5월 21일 (음력)
만세력으로 환산을 해보니 양력으로는 6월 26일 오후 6시경이었다.
태어날 때는 보리고개라는 엄청난 시련이 있었다.
양식이 떨어지고 햇보리는 아직 먹을 수 없어서 설익은 보리를 배어서 떡보리라고 그냥 보리를 쩌서 먹을 때였다. 불실하게 태어나서 어머니 젖을 빨 수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할머니)말씀) 태어나고 일주일만에 일시적으로 숨이 끊어졌다
다음날 새벽에 버린다고 이불을 뒤집어씌어놓았다. 할아버지(증조부)께서 바지게를 안 뜰에 대어놓고 며느라 이제 내어두고 해서 어머니가 마지막 얼굴을 한 번 본다고 들서보니 숨을 쉬고 있었단다. 그래서 불야불야 부엌에 가서 물을 대워서 숟가락으로 떠먹이니 받아먹었단다. 그러자 날이 새고 다시 보니 새근새근 잠이 들어서 키웠는데 잘 자라 주었단다.
말이 잘 자랐지
사실은 대가족이 사는 집이라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 한 것이란다.
식구가 자그만치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두 분 아버지 어머니 누나.형님 동생. 삼촌네내외분 두 어린이 14식구가 한 집에 살았단다. 그러니 키워서 컸다기보다는 저절로 큰 것이다.
태어나서 말고도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겼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
첫 번째는 큰 못이라고 하는 못에 말(물속에 자라는 풀) 치러 가서였다.
내가 5-6살 쯤 되었을 때인데 할머니와 삼촌을 따라서 갔던 것이다.
그 때 나는 할머니 방에서 자고 형님은 어머니 방에서 잤을 때이다. 한 방에 다 잘 수가 없으니 나는 항상 할머니가 어머니처럼 나를 데리고 자고 어디를 가도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아주 이른 봄이라 못 가에는 얼음이 녹았고 가운데는 얼음이 있었다.
말빗이라고 머리빗처럼 커다랗게 생긴것을 던저서 말이 걸려나오게 하였다. 그런데 말이 거려 나오다가 물가에 떨어져 있는 것을 건진다고 엎드리다가 물에 빠진 것이다. 얼음물에 빠졌는데 세 번을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면 다시는 올라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 세 번째 올라올 때 삼촌이 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집에 오지 않고 못가에 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면서 옷을 말리고 삼촌은 말을 쳐서 집에 온 기억이 있다. 그 때 영 죽을 번 하였지.
두 번째는 10살쯤 되었을때인가 앞 개울가에 있던 우리 밤나무에 올라가서 냇가 자갈밭에 떨어졌는 데 그렇게 높은 가지가 아니라서 살았다.
세 번째는 중학교 1학년 여름인 것 같다. 어미소를 풀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오니 집에 있던 젖먹이 송아지가 반가워서 이리뛰고 저리뛰는 바람에 송아지 줄에 감겨서 내가 넘어져서 송아지가 나를 짓밟아버렸다. 온 몸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으나 살았다. 그 때 창자라도 터졌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농사일은 잘 못했다.
어릴 때 소풀(꼴)(이른 봄에 들판에 돋는 새싹)을 하러 가면 늘 다래끼(가는 나무줄기를 엮어서 만든 물건 담는 기구) 반을 채우지 못하였다. 형님은 가득 차도록 해오지만 그래서 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왜 너는 반 밖에 하지 못 하였느냐?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면
형님이 다 하여버려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곤 하였다. 대신 글은 형님보다 더 잘 읽은 것 같다. 시골의 사랑방에서 천자문을 방문 열어놓고 읽던 기억이 난다. 꿇어앉아서 하늘 천 따 지를 배울 때는 내가 더 빨리 외운 것 같다.
수학(그 때는 산수라고 했다.)도 꾀 잘 한 것 같다.
고모님(대구에 계시다가 3년 전에 돌아가심)이 일본학교 다닐 때 얼마 더하기 얼마를 내었는데 내가 금방 알아 맞춘 것 같다. 물론 학교 들기 전이어서 고모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 같다. 가을이면 벼를 추수해서 탈곡할 때 볏짚을 기계 뒤로 던져 놓으면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게을러서 숨어서 쉬다가 할아버지에게 지게작대기로 머리를 두둘겨 맞아서 머리에 혹이 두 개 난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못 마땅하여 늘 그 이야기를 하셨다. 아마 7-8세 되었을 때 인 것 같다. 지금도 내 머리를 보면 가운데가 오목하고 양쪽이 튀어올라있다. 그 때 맞아서 그렇다고 어머님이 늘 말씀하셨다. 그러나 설마 맞아서 그렇겠나만은 어머님은 내가 너무 어려서 안스러웠던 모양이다. 늦은 봄이 되면 새벽에는 마을 앞에 여자분들이 줄을 이어 계곡으로 들어가고 어둠이 깔릴 때면 보퉁이 보퉁이를 이고 지고 내려갔다 나물 마중 간다고 남자들이 지게를 가지고 산으로 가서 나물보퉁이를 받아지고 내려오는 길이다. 물론 우리 엄마도 나물 하러 가셨다. 그렇게 나물을 해오면서 보퉁이에 꼭 길다란 막대가 몇 개씩 꽂혀 있었다. 송구라는 것인데 앳된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겉껍질은 버리고 속껍질을 먹는 것이었다. 자식들 주기 위해서 모두들 몇 개씩 꺾어오는 것이었다.
그것 받아먹으려고 나물 보퉁이 마중을 가곤 했는데 사실은 송구만 받아왔지 나물은 역시 엄마가 이고 왔다. 조금 커서 지게를 질수 있게 되었을 때는 조금 도움이 되었겠지
이렇게 해 온 나물은 말려서 겨울에 나물죽을 쑤어 먹었다.
어린이들은 감꽃을 주으러 다녔다. 감꽃을 주어서 실에 꿰어서 말리기도 하고 그냥 먹기도 하고 밥위에 쪄서 먹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감이 생기면 아주 작을 때 도토리만할 때도 물에 담그어 놓았다가 먹었다. 산에 가서는 빼기라고 하는 풀뿌리를 케어먹고 잔디라는 풀은 지근지근 씹어서 물을 빨아먹고 새바우라는 뿌리는 아주 귀했는데 캐면 아주 좋아했지 뿌리가 조금 굵기도 하고 굵어보아야 고구마 아주 잔 것 만했지 이렇게 산이나 들이나 돌아다니면서 잘 자랐다. 놀이라는 것은 팽이를 돌리고 겨울이면 얼음 지치고 논에서 축구도 하고 공은 짚으로 만들었다. (볏짚을 돌돌 뭉쳐서 새끼로 꽁꽁 묶었다고 할까 몇 바퀴를 돌린 것이다.) 냇가에서는 가재도 잡고 새우도 잡고 어쩌다가 미꾸라지라도 한 마리 잡으면 굵은소금 한 두 개 넣고 호박잎에 싸서 부엌에 묻어 두면 잘 익었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이렇게 천방지축으로 잘 자랐다.
옷과 신발에 대해서
나는 초등학교( 그 때는 공립초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신을 신어보지 못한 것 같다. 여름에는 응당 더우니 맨발로 다녀도 아무런 불편을 못 느꼈는데 겨울에는 매우 추워서 밖에는 잘 나가지 않았고 소변은 요강에서 보았고 대변을 보러 가면 맨발로 갔다가 걸레에 발을 닦고 집안을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설이 되어야 짚신을 얻어 신었던 것이다. 가끔 할아버지가 짚신 삼는 옆에서 나도 따라서 해보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여름에는 할아버지가 발시러우냐? 하셨고 겨울에는 뱀이 없으니 괜찮다 하셨다. 자식에게도 신기지 않는 신발은 그래도 겨울 내내 삼으셨다. 시장에 가서 팔아서 생필품이라도 사야 하니까)
옷은 내의라는 것은 그 때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고 한복 바지,저고리를 여름에는 삼베로 만든 것이었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최고급 옷이지만 그 때는 집집마도 삼을 직접 심어서 삶고 벗기고 째고 삼고 날고 베짜고 옷하는 것을 다 하였고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겨울에는 무명으로 만든 옷이었다. 물론 목화를 심어서 목화 따고 씨아로 씨앗을 골라내고 활로 타고(부드럽게 하는 방법) 고치를 만들고 실을 잣고 꾸리에 감고 날고 베를 짜는 과정을 전부 직접 한 것이었다.베에 물들이는 것도 물감을 사오셔서 집에 들였다.이렇게 만든 옷이니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면 옷 섶이 휙 날려서 그냥 맨살이 나왔으니 얼마나 추웠겠니? 그렇게 자라서인지 매우 강한 체질이 된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강한 분이었다. 그렇게 삼은 신발을 시장에 내다 파셨고 솥갑(소나무 가지 친 것)장사도 하셨다. 소에 솥갑을 싣고 시장에 가는 날이면 나도 따라 나셨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솥갑을 지게에 지셨으니 소를 내가 몰고 따라나선다 그 먼 (6KM)시장까지
걸어가면 엿 한 가락을 사 주셨기 때문이다 그 엿 얻어먹으려고 먼 길을 멀다않고 따라나선 것이다. 솥갑은 겨울에 해서 나뭇가리를 만들었다가 겨울 내내 부엌에 불 때고 남는 것을 이듬해에 판 것 같다. 요즈음은 돈 준다 해도 걸어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자라서 1948. 9. 1 초등(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 때는 9월에 입학해서 3월에 졸업을 했으니 나는 5년 6개월만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다. 한 반 뿐이어서 전교생들을 거의 알게 되었고 더욱이 형님이 3학년이라 형님 친구들이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단다.
막내 고모는 6학년이었는데 1회생이었는 고모의 친구들이 무척 귀여워해주었다. 처음으로 고무신이란 신을 신고 학교를 들어갔고 교과서는 자기가 사고 싶은 과목만 사는데 거의 국어와 산수(수학)만 사고 미술이나 음악 교과서는 거의 사지 않았다. 국어와 산수 교과서도 못 사는 아이도 있었단다. 그래도 교과서가 나오지 않아 1학년 2학기는 교과서 없이 공부를 한 것 같다. 2학년 때부터 반장을 해서 6학년 졸업할 때까지 계속 반장을 한 것이다.
성적은 그냥 평균이 90점 정도 되었는 것 같고 학교 전체의 일을 맡아서 한 적이 많았다. 그러다가 3학년 때 6.25전쟁이 나서 학교는 폭격을 맞아 가운데가 내려앉아 한 쪽 벽은 막지도 못한체 한 해 겨울을 공부하기도 했단다. 창문 물론 없었지 눈이 오면 창문쪽에서 눈이 훨훨 날아들기도 하였으나 그것만으로 다행이었다. 학교가 완전히 타 없어진 곳도 있었으니 그런 학교는 동네마다 학년별로 모여서 공부했단다. 여름에는 나무 밑에서 공부하고 겨울에는 동네 정자같은 곳에서 공부했단다.참으로 어렵게 어린 시대를 보냈지.여름이면 산에 가서 소나무 가지를 처 와서 학교지붕을 온통 덮기도 했단다. 적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한 번은 산에 소나무가지 하러 갔다고 엄청난 실탄을 주워서 상급학년에게 빼앗기기도 했단다. 전쟁중에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12월만 되면 국군아저씨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위문편지를 쓴는 것이 연중행사였고 드디어 1953.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단다.
교실도 제대로 없고 겨울에는 추워서 집집마다 장작을 가져와서 난로를 피웠다.
난로가에 서로 앉으려 하였고 그래서 자리를 돌아가면서 앉은 것 같다.
점심시간에는 집이 가까우니 집에 뛰어오면 나물 죽 한 그릇이 기다리고 있었다. 봄에 해서 말려 놓은 나물로 죽을 쑨 것이다. 아마 거의 매일 죽이었지 싶다. 그래서 탁이(서울 삼촌)
가 서울에 발령을 받고 나에게 편지를 쓴 처음의 글이 우리가 어릴 때 먹은 묵나물죽 이야기가 나왔더라. 다른 집도 다 묵나물 죽을 먹는 줄 알았다고...
오전 오후반이 있었는데 오후반이 되면 집 앞의 논에서 짚공으로 축구를 하기도 하고 여름이면 개구리를 잡아 솥에 삶아먹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6학년을 마치고 중학교 시험을 치루는데 원서값을 낼 형편이 못되어
형님만 중학교에 가고(맏이만 공부시킬 때) 집에서 농사나 지어라고 하셔서 울고불고 해서 겨우 한 학교(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만 원서를 낼 수 있었다. 6학년 때 국가고시가 생겨서 전국적으로 고시를 치루는데 우리학교에서 못 치루고 면 소재지 학교에 가서 치룬 것 같다.
그 성적으로 중학교에 원서를 내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요즈음 말하면 수능 시험 같이 말이다. 우리학교는 규모가 적어서 무슨 행사는 꼭 큰 학교인 면소재지 학교에 가서 하였다. 5학년 때 실기 대회가 생겨서 서예에 내가 나가고 그리기 글짓기에도 나갔는데 내가 서예에 2등을 하였고 2학년이던 교장 딸이 그리기에 입상을 한 것이 우리학교가 대외에 나가서 상 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그 성적으로만 한다고 했는데 다시 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안동사범병설중학교는 경북북부지방에서는 가장 좋다고 하는 학교였으니 각 군마다 내노라 하는 사람만 시험을 치루게 되는 데 무려 8:1이었다. 시험을 치루고
담임선생님이 2차로 안동중학교에 원서를 내라고 하는 것을 나는 안 낸다고 하니 담임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해서 담임이 원서를 내어 주셨다. 시험치기 전 날 기차를 타고 안동 중학교 옆에 자취를 하는 형님을 찾아 갔다 다음 날 아침 시원하게 낙동강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오라해서 걸어서 30분 쯤 가니 조그만 도랑이 있어 그것이 낙동강인 줄 알고 세수를 하고 왔더니 그것은 물도랑이고 그 넘어서 낙동강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시험을 치루고 한 달 후에 합격발표를 하는 날 결과를 보러 나 혼자 갔었다. 그 때는 두루마리 종이에 붓으로 길게 써 붙였는데 처음부터 차례로 훑어 보니 한 참을 걸렸는데 끝에서 20번째 쯤 내 이름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특차인 중학교에 합격을 했다고 난리가 났다. 우리면에서는 세 사람 큰 학교인 면소재지학교에서 두 사람 그리고 우리학교에서 나였다.
우리학교가 생기고 처음으로 병설중학교에 합격하였다고 공부 잘 한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입학금이 비싸서 또 학교에 못 갈 것 같이 되었는데 담임과 교장이 아버지를 설득하여서 송아지를 팔아서 입학금을 내었다. 이 때부터 우리집은 남의 소를 길러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아버지에게 죄스럽다.
중학교 생활
원래는 한 반을 60명씩 뽑았는데 들어가보니 82명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때는 경제가 하도 안 좋아서 선생님 1인당 몇 명씩 보결생(돈받고 입학시켜주는 방법)을 배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친인척들과 부잣집 아이들이 입학을 하다보니 한 반에 정원의 20명이상씩 되었다는 선배들의 말이었다. 나는 81번이었다. 호적상 늦어서 그렇게 되었다. 집에서 기차역까지 6KM를 걸어서 기차를 타고 30분 내려서 20분정도 걸어서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때는 기차도 석탄으로 가는 기차라 자주 연착을 해서 학교에 도착하면 지각을 곧 잘 했단다. 봄여름가을 까지는 통학을 하고 늦은 가을부터 겨울은 방을 하나 얻어서 자취(밥을 직접해먹는 것)를 하였다. 이렇게 삼년을 다니면서도 하루만 결석을 하여 졸업할 때 정근상을 받은 것 같다. 토요일이면 일찍 마치나 기차는 제시간이 되어야 오니 기차역에 놀다가 어떤 기차라도 오면 타고 내려가다가 다행히 내가 내려야 하는 기차역에 서면 내리고 서지않으면 다음 설 때까지 가서 놀다가 다시 올라오는 기차를 타기도 하고
아니면 낙동강가에 나와서 검문소 (다리마다 차량을 점검하는 장소)에서 군인들이 자동차를 검문하면 서니까 몰래 뒤으로 타고 가다가 내리는 방법으로 공짜 차도 많이 탔단다.
고등학교 생활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고등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사범학교를 가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농사를 너무나 어렵게 하셔서 내가 좀 과학적으로 지으려고 농업고등을 희망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사범학교에 갔다. 우선 학비가 싸고 잘 하면 국가에서 주는 돈으로 등록금은 되니까. 사범학교 시험 때 음악 노래를 불러야 되는데 아는 노래가 있어야지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가를 부르는 아이는 나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것도 음정 박자 하나도 안 맞으니 떨어지리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합격이 되었다. 아마 필기시험이 괜 찮았던가보다. 어쨌든 3년을 다니고 졸업을 하니 나이가 모자라서 발령이 나지 않았다. 1년이 모자라서 어디로 탈출구를 찾는데 삼척이란 곳으로 가게 되었다.
삼척에는 막내고모(지금묵호고모)가 소개해주시는 가게(과자상점)의 점원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물론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고 갔다. 가기 전에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을 뵈옵기 위해 새볔에 길을 나섰다. 아침을 굶고(일부러 굶고 얻어먹는 연습을 하려고)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라는 곳을 찾아가는데 정말 산골이었다. 가다가 배가 하도 고파서 어느 집에서 밥 좀 달라고 했더니 안 주더라. 여러집을 거쳐 결국 선생님 댁에서 밥을 얻어먹고 그 학교의 분교장에 계시는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가니 얼마나 첩첩산중인지 길가에 썩은 마무가 쓰러져 있고 종일 걸어서 저녁 때가 되어서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담임과 처음으로 너도 사회인이니 술 먹어도 된다고 막걸리 같이 마시고 돌아왔다.
그리고 삼척으로 가는 데 기차를 타고 영주에 가서 두 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다시 강원도 가는 기차를 타고 갔는데 도계라는 곳은 석탄으로 인하여 냇물이 검을 정도로 석탄을 많이 생산하였다. 상점에 찾아가서 보니 과자( 사탕, 유과 센페이등)를 만들어서 파는 가게였다.
총무라는 직책으로 과자 만들어 내면 그것을 종이로 싸는 데 저울로 달아주고 계산하여 돈을 지불하면서 과자도 팔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달아주는 날 임금이 많이 올라갔다. 그래서 주인에게 야단을 맞았다. 속이라는 것이다 .2킬로그램 되면 1킬로그램으로 아이들 겨우 초등학교 졸업하고 돈 벌려고 하는 데 ...
그리고 기술을 배우려 와 있던 어린애들은 임금이 없었다. 왜 안 주느냐?고 물어보니 기술 배우고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무슨 임금이냐?는 것이다. 나도 임금 결정도 하지 않고 한 달 있어보니 견딜 수가 없어서 나왔다. 이 때 장날이면 상탕을 장차라는 차에 싣고 면소재지 장으로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데 짐을 차에 실어 놓고 다음 날 무슨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가 보았다. 정말 신기했다. 장차란 트럭인데 거기에 짐을 가득 싣고 그 위에 사람들이 타고 새벽에 갔다가 밤중에 오는 것이다. 정말 힘든 시기였으니 모두가 이렇게 살았었다.
한 달 쯤 후에 상점을 나와서 삼척세멘트회사 사택에서 가정교사를 시작하였다. 오전에는 오십천에 은어 낚시를 하다가 오후가 되면 1학년 1면 5학년 4명 6학년 1명 저녁에는 고등학생 1명(수학만) 지도를 하고 다음해 봄에 내려왔다.
이듬해 봄에 집에 내려와서 첫 발령을 받다.
어느 날 갑자기 목에서 피가 올라왔다. 아버지가 한의사이니 먹을 갈아서 마셨다. 얼마를 먹었는지 멈추었다. 붉은 색과 검은 색은 중화를 시키는 음양법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때 병인 줄 몰랐다. 그러다가 봄이 다 갈 무령 4월 중순 경 울를도로 발령이 났다는 등기 우편을 받고 그 날부터 준비를 하였다. 난 생 처음으로 가다마이라는 양복도 안동에 가서 맞추고 이불도 하나 만들고 속옷도 몇 가지 준비를 해서 포항에 있는 최무석( 탁이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배를 알아보고 포항으로 내려갔으나 배가 출항하지 않아 무석이 집에서 잤다. 그 때는 금파호 (목선 150톤 정도) 천양환 (화물선 100톤정도) 영풍호(화물선 100톤정도) 세 척이 있었으나 사람을 태우는 배는 금파호가 유일했으나 30명정도 밖에 태우지 못하였다. 나날이 부두에 나갔으나 배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기 때문에도 가지 않지만 화물 위주이기에 화물이 가득 차지않으면 출항을 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에 배가 출항을 해서 울릉도에 17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을 하니 또 작은 배에 옮겨 타고 내렸는데 교육청에 들리니 내 발령장이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아서(나는 바로 교육청으로 가고 서류는 우체국을 통해서 가니) 어느 여관방에 기다리게 해서 (교육청부근에 다방이 없어서 ) 교육청 직원 한 사람과 기다리니 이제야 우체국에서 내 우편물을 찾아와서 발령이 났다고 오라해서 교육청에 들리니 현포초등학교에 발령이 났다고 교육청 직원 한 사람과 걸어서 현포까지 가니 벌써 날이 어두웠다. 마을좁으니 학교로 연락을 해서 교사 한 사람이 나와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5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사택을 배정받아(울릉도에는 각 학교 마다 사택이 있었다.그래야 육지에서 온 선생들이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울릉도에 있는 선생도 다른 학교로 가면 생활을 하여야 하니까)
5월 1일자로 발령을 받고 그 해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현포에서 가장 부자라는 너의 어머니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너의 어머니는 6학년이고 중하교 입학시험이 있을 때이고 아마 육지로 중학교를 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어쨌던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여름방학이 되어서 집에 가겠다고 하니 학교에서 보내주지를 않았다. 왜냐하면 육지에 가서 다시 안 들어 올가 보아서 그 때는 한 번 나가면 안 온 사람도 있었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하숙하고 있는 집 어린이 둘 (어머니와 큰 외삼촌 2학년) 을 데리고 간다니 허락을 해주어서 데리고 나와서 우리집에서 막내 삼촌과 같이 놀다가 사범학교에 가니 과학선생님이 제자의 제자가 왔다고 과학실에서 영화도 보여주고 학교선생님들이 울릉도 아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모여들었다. 그 때 서울과 불국사를 구경시키고 방학 마치고 들어갔다.
울릉도에서 3년을 보내고
1년을 현포에 근무하고 그 이듬해 3월 1일자로 우산초등학교로 전근을 했다. 원래 1년 미만은 전근을 가지않는데 울릉도는 특수지역이고 우산학교가 도 연구학교라 사범학교졸업자만 모으려고 한 것 같다. 그 때 울릉도는 수산고등을 나온 사람도 선생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옛날 이야기 같다. 군사혁명 전 까지는 군에도 가지않은 사람이 많아서 혁명이 나고 일시에 국토건설대와 군에 입대하고 나니 직원이 부족해서 임시로 83명을 모집해서 울릉도로 발령을 내니 사범 출신이 거의 없을 때였다.
여름에 연구공개를 마치고 다시 현포로 전출을 가서 거기서 1년 6개월만에 울릉도에서 3년을 보내고 1964년 3월 1일자로 영주군 단산면 옥대학교로 전출을 하게 되었다. (6개월 근무)
울릉도에서 2년만에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 해 여름에 안동보건소에서 다시 진단을 하니 결핵이 맞았다. 그 때는 의학이 발달되지않아 결핵이 걸리면 거의가 죽고 청년이 많이 걸린다고 망국병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그래서 영주에 오면서 어느 광고를 보니 공군에는 의료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병을 고쳐 나온다는 말을 듣고 육군입대가 12월이라 몸도 약한대 훈련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공군에 지원 입대를 해서 6개월간 근무하고 7개월간 병원에 입원했다가 쓸모없다고 의병제대를 한 것이다. 1964년 9월 1일 입대해서 1965년 9월 말일 제대 해서 11월 1일자로 영주 부석 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중간발령을 받고
9월 30일자로 의병제대를 했으니 어디 요양이나 할까 하고 한 달 동안을 산속을 헤메었으나 경제력이 없어 결국 10월 25일경에 복직서류를 내었더니 금방 발령이 났다. 부석학교로 발령을 받고 가보니 4학년 담임이었다. 4반까지 있었는데 나는 3반을 맡았다. 3반을 맡았던 선생님이 군에 갔기에 내가 대신 맡게 된 것이다. 벌써 11월이라 겨울의 난로 땔감준비로 아이들은 데리고 산으로 가서 솔방울을주어오기도 하고 아이들이 집에서 장작을 가져오기도 했다. 시골이라 어느 조그만 여관방에서 하숙을 하였다.
이듬해가 되자 6학년을 맡게 되었고 과외수업으로 저녁에 촛불을 켜놓고 하였다. 그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그 때 과외수업을 하다가 옆교실에 쾅하는 소리가 나서 가보았더니 천정에 올라가 놀던 아이 셋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때는 천정위에 공기차이란 구멍이 있어서 올라갈 수 있었다. 몇 년전에 부석학교 총동창회를 내가 6학년을 담임했던 그 사람들이 주최를 한다고 해서 가 보았더니 호텔을 하나 잡아놓아놓고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 때 천정에 올라가서 떨어졌던 사람 누구냐고 했더니 두 사람은 알아내었는데 한 사람은 못 찾았다. 이 때는 문화부가 없고 문교부 체육과에서 문화재를 담당했는데 내가 그 때 부석사를 맡아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청소해주러 올라가보았다. 아마 이때부터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삼년을 부석에 있다가 1968년 3월 1일자로 경주 양남면 상계초등학교로 전출을 하게 되었다.
경주(월성)교육청으로 발령을 받고 학교를 알아보기 위해 교육청으로 갔더니 아예 이불과 옷가지를 싸가지고 학교로 가라는 것이다. 학교가 하도 산촌이라 들어갔다가 나올수 없다는 것이다. 그 때는 버스도 잘 없고 있다해도 면소재지까지만 다녀서 양남 상계라는 곳은 벽지였다. 버스다니는 도로에서 4길로미터쯤 걸어가야했다. 3월 1일 기차로 울산까지가서 울산에서 버스로 들어가서 학교까지 가니 벌써 오후가 되었다. 이불보따리 하나와 옷가지를 넣은 가방하나가 전부였다. 한 손에는 이불 한손에는 가방을 들고 한 시간쯤 걸어서 학교를 찾으니 한 학년이 한 학급인 조그만 산촌학교였다. 학교앞 가게에다 지을 맡기고 발령장만
들고 교무실을 찾으니 내가 오는 줄 알교 직원들이 남아있었다. 공휴일인데도 교장에게 인사를 하고 자취를 할 것인가 하숙을 할 것인가를 묻기에 하숙을 하겠다고 하였다. 학교다닐 때 자취를 해보니 고생이 너무 많아 돈이 좀 더 들더라도 하숙을 하겠다고 하였더니 시골에서 혼자사시는 집에 이야기를 하여 하숙을 하게되었다. 집이라야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이라 자다가 가끔 지네가 방바닥에 기어나오고 이름모를 곤충들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하랴 그 학교는 제주도에서 온 선생님이 셋에다가 일반대학을 나온 사람이고 정식 사범학교를 나온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그래서 아이들 언어상 1학년을 맡으라고 해서 그대로 맡았다. 있어보니 간첩이 얼마전에도 나타난 곳이라서 해병대들이 쫙 깔려있었다. 여기서 2년을 보내는데 어촌 사람들이 생선을 바구니에 이고 아침마다 곡식과 바꾸기 위해 마을로 올라오기도 하고 저녁으로 숙직을 하다보면 동네 청년과 처녀들이 와서 다탕내기 화투도 치고 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어느날 사탕을 사 와서 먹다가 사탕이 얼마나 야문지 쇳덩어리 같았다. 무슨 사탕이 이렇게 야무야고 가게주인을 욕하면서 먹으니 아무래도 쇳덩이같아 뱉아보니 내 이치였다. 이 두 대를 덮었던 산뿌라라는 쇠였다. 소풍을 바닷가로 전교생이 같이 가서 교직원들은 멍게를 뱃사람들에 한 가마니 부탁했더니 한 사람이 배를 타라는 것이다. 그 때는 양식이 없을 때이니 순순한 자연산인데 어디에 있는가를 보아놓고 주문을 받으면 들어가서 따 오는데 따 오면 주문한 사람이 없을 때도 있다면서 한 사람일 배를 타라는 것이다. 아무도 배를 타지 않으려고 해서 내가 탔다 나는 울릉도에 있었고 술도 먹지 않아서 내가 탔다. (결핵약을 먹고 있어서 술 담배는 일절 하지 않았다.)
30분정도 나가더니 배를 멈추고 물속에 들어가서 따는데 20분하니 한 가마니를 따서 돌아와서 직원들이 아무리 먹어도 다 먹지 못해서 까서 실에 꿰어서 가지고 온 일도 있었다. 그 때만 수산자원이 아주 풍부했다. 물곰같은 고기는 보기싫다고 잡혀도 다 버리던 때였다.
그 해 12월 내년에 들어올 아이들을 조사하러 가는데 그 날 돌아오지 못하고 마을에 가서 밤을 자고 다음날 등고하는 아이들과 함께 오기도 하였다. (주민등록이 안 되었을 때라 직접 가서 조사를 하였다.) 얼마나 산속인지 알 수 있겠나. 갈때는 물론 6학년이 공부를 마치면 오후 3시쯤 되니 그 아이들과 같이 갔는 12월이라 해가 짧아서 동네에 이르니 이미 캄캄하였다. 이 때 교감이 월급을 타러가서 우리 전 직원의 월급을 잃어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 이 때는 월급을 현금으로 주었음) 한 달 월급을 다 잃어버렸으니 어떻게 하나 안 탈 수도 없고 직원회의를 해서 반 만 타기로 하고 그 교감은 사표를 내어서 퇴직금으로 우리 월급의 반을 갚은 것이다. 옛날 이야기이지 상상이 안 갈 것이다. 이렇게 2년을 보내고 건천학교로 전근을 하게 되었다.
건천학교에서 3년
전입하자마자 6학년을 맞게 되었다. 그 때는 6학년을 서로 할려고 해서 새로 전입해온 선생에게는 주지 않던 시대임으로 동료들로부터 질투를 샀다. 사실은 내가 희망도 하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주어서 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보아주지 않았다. 4반까지 있어서 6학년 선생님도 세 사람은 전에 있던 사람이고 나만이 새로 온 사람이었다. 특히 6학년을 희망했는데도 담임을 하지 못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는데 이 사람들로 부터는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였다. 요즈음 말로 왕따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아예 희망을 4학년 하였다 4학년 5학년은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학년이라 희망대로 4학년을 맡고 주임을 한 것이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러다가 경리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내가 경리를 보게 되었다. (그 때는 행정직원이 없고 교사가 경리도 하였다.) 전교생이 다달이 시험을 쳐서 그 결과를 발표하던 시대였다. 학년별로도 치고 학교전체가 치기도 하고 군 전체가 치기도 하고 시험성적을 대단히 중히 여기던 때였다. 총각 때이니 아침마다 일찍 출근하여 문제지를 전체적으로 풀리고 모르는 것 다시 하고 학급에서는 거의 매일 시험을 치루었다.
학년 1등을 하면 커다란 타울을 전교 1등을 하면 스텐레스 밥그릇을 한 벌 주었다. 다달이 치루는데 타울은 타 보았는데 밥 그릇은 타 보지 못해서 기어코 타 보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4-6학년 까지는 체점을 하고나서 우리반이 1등했다고 소문이 나서 이 번에는 타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다음 날 치는 1학년 성정이 월등해서 또 못타기를 여러번하였다.
4-6학년을 운동장에 불러내어 의자를 들고 나와 사방 1미터 간격으로 놓고 전선생님과 교장선생님 교감 모두가 나와서 지켜보는데서 치루었다. 체점은 교무실에 모여서 학년을 바꾸어서 하고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한 꺼번에 치룰 수 없어서 다음 날은 1-3학년이 같은 방법으로 치루는 것이다. 그래도 꼭 한 번은 전교 1등을 하고 싶어서 몇 달만인가 한 번 하였다. 그 때 우리 반 평균이 예체는을 합하여 89.얼마였는것 같다. 드디어 1학년을 제치고 1등을 한 것이다 고학년에서 1등이 나오기는 처음이라고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그 때 받은 밥그릇이 집에 있어서 너 밥 받아먹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머니는 그 밥그릇을 사용했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건천에서 3년을 보내고 1973년 3월 1일자로 포항시 동부초등학교로 전출을 하게 되었다.
사표를 내다
포항으로 전출을 한 이유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다 그 때는 선생의 월급이 적어서(보나스도 없을 때) 공무원해서 밥 먹고 살겠느냐는 식이었다. 장인 될 사람이 사업을 해보자고 해서 포항에 공장을 하나 지었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모두어 놓았던 돈을 드려 남의 땅에 30평짜리 건물을 짓고 구라비아 인쇄라고 아이그케이크 포장지를 인쇄하는 것이었는데 학교는 그대로 다니면서 하는데 잘 되지를 않았다. 첫째 아무런 기술이 없으니 기술자에게 늘 당하고 둘 째 납품을 받는 사람들이 돈을 제대로 주지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사고를 내어서 1973년 7월 27일 그만 사표를 내고 전적으로 사업만 하려고 내가 도안을 만들어서 동판을 뜨기도 했으나 조잡하고 이미 운영비가 없어지고 해서 문을 닫게 되었다. 원래는 나는 공장만 짓고 기계와 기술은 다른 사람이 하기로 했으나 그 사람은 이미 다른 사업을 하고 진실성이 전혀 없어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사업도 실패하고 아무런 생계대책이 서지않아 길거리에 냉차장사를 해보려고 그 곁에 앉아서 얼마나 팔리나도 보고 어떻게 팔면 잘 팔릴까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집에서 양식을 갖다 먹고 그러다가 별이가 태어나고 별이는 병원에서 낳지를 못하고 가정집 그것도 아주 허술한 연탄연기가 새어나고 방바닥이 울퉁불퉁한 집에서 장판을 들서보니 습기가 차 있는 그런 집 비가 오면 마당에 물이 가득 차서 아이들이 다라이를 배처럼 타고 다니던 아주 지대가 낮은 곳의 허술한 집이었다. 산파를 불러서 낳기는 낳았는데 아주 튼튼한 아이같이 보였다. 그러나 젖을 잘 먹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서 시골 어머님(별이 할머니)이 오셔서 성주신에게 물떠놓고 빌기도 하였으나 젖을 잘 빨지 못하였다. 퇴직금 탄 것 가지고 그런대로 밥은 먹고 살았으나 이제 퇴직금도 다 떨어져서 어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그해 1월 우연히 세일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어서 세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밑천이 하나도 들지 않고 남의 물건을 팔아주고 판매이익의 일부를 받는 것이었다. 그 때 데푸론이라고 냄비 바닥에 코팅을 해서 기름없이도 계란 후라이가 냄비에 붙지않는 신기한 것이었다. 포항 어느 여관에 기숙을 하면서 판매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하기로 했다. 포항에서 첫 날 그 사람들이 하는 뒤를 냄비 한 손에 다섯 개씩을 들고 하는 방법을 배우러 갔다가 그들이 하는대로 판푸렛을 외우고 하루를 견습하고 다은 날부터 직접 팔기를 시작해서 첫 날 다섯 개를 팔아서 인정을 받고 포항에서 장사를 한 달정하니 한 달의 생활비는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포항은 더 다닐 곳이 없어서 대구로 올라간다고 하기에 나도 혼자 그 사람들을 따라 대구로 올라와서 대구역앞의 극동여관이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관비는 업주가 내고 나는 판매이익만 받는 것이었다. 이 때가 아마 가장 힘든 때였지 싶다. 엄마와 별이는 포항의 허술한 집에서 겨우 밥이나 끓여 먹고 아마 굶는 날도 있었지 싶다. 그러기를 몇 개월 그런 장사를 하다보니 같은 계통의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내가 몸을 담았던 사장이 다른 곳으로 갔으나 나는 갈 수가 없어 다른 팀으로 옮겼는데 그 곳은 요리강사가 요리를 하면서 파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일하면서 대구로 옮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 어느 신문을 보니 뇌성마비라는 병에 대한 설명을 읽고 별이가 혹시 해서 병원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의사가 그런 것 같다고 말하여 별이가 젖을 제대로 빨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시골 할아버지에게 알려드렸더니 그런 병은 한 방에는 없으니 발육이 늦어서 그렇다고 봉화의 어느 유명한 한 의사에게 약일 지어오셨다. 그것을 다 먹여도 낫지를 않았다. 다시 소아과 의사를 찾았으나 잘 키우라는 말만 할 뿐 어떤 대책이 없는 듯 말하였다. 이듬해 봄 포항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대구로 옮겼다. 동대구 역앞 신암동 어느 부엌도 없는 집 5만원 사글세였다.
본격적인 세일 시작
그렇게 세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판매방법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브리테니카란 백과사전(영어로 된 백과사전)을 팔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시작했으나 워낙 비싼 책이라 한 질밖에 팔지 못하였다. (한 질 값이 그 때 돈 120만원으로 생각됨)동시에 두 가지, 냄비도 팔고 책도 팔고 하였다. 이 때 카바레라는 것이 있는 줄을 처음 알았다. 카바레 아가씨들에게 냄비를 팔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보는 물건이고 아가씨들이 게을러서 씻기 쉬운 데푸론이란 것을 선호하였다.
그러다가 요리책을 팔아보는 것이 더 잘 팔릴 것 같아 한림출판사에 들어갔다. 한림출판사는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두 번 요리강의를 하고 책을 파니 책이 잘 팔렸다. 요리강의를 하고 요리기구를 파는 것 보다는 책이라는 데 더 매력이 있고 가지고 다니기도 편하고 아무래도 냄비 들고 다니는 것 보다는 책이 더 보기도 좋아서 했는데 그것도 대구시를 두루 돌아다니다 보니 거의 다 다니고 나니 다음 할 것이 없어서 어린이 책을 주로 판매하는 계몽사에 들어갔다가 금성사로 그것도 잘 안 되어서 다시 화장품 가판을 시작하여보았다. 전창식이란 친구가 내보다 나이는 적지만 판매는 선배라서 이 친구와 작당을 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진을 치고 팔아보았으나 별로 팔리지 않아서 다시 책(해적판=정식으로 만들지 않고 조잡하게 만든 것)을 팔기로 했다. 이것은 아주 헐 값이어서 한 두권 사서 팔고 다시 서점에 가서 사서 팔고 하는 방법이다. 대구에서 거의 돌아다니고 나니 부산으로 가서 팔기도 하였다. 정말 하루 팔아서 하루 먹는 식이었다. 이 때는 엄마는 철이를 낳기 위해 울릉도로 별이를 데리고 가고 나는 혼자 여관에서 자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하였다.파티마 병원 곁에 덕성여관인가 방하나 얻어놓고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들이 먹는 아침식사 한 끼하고 회사(책이나 냄비등 물건 대어주는 회사)에 가서 그 날 차비와 식대를 받아서 나가는 그런 것이었다.
그것도 안 되어서 서울 삼촌(교장했던)의 친구가 메모리 스텐드라고 돌사진이나 회갑사진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사진 틀을 개발했다고 같이 해보자고 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수유리라고 회갑잔치를 많이 하는 곳과 사진관을 매일 돌아다녔으나 별 성과가 없어서 춘천에 요리기구파는 팀이 와 있다고 거기까지 가보았으나 거기는 거의가 부부가 하는 팀들이라 서울에 와서 다시 해보았으나 역시 별 성과가 없어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다시 여성들이 잘 하는 자수 책을 팔기로 했다.그러다가 한국일보대구지사에서 한국의 동양화라는 책 25권이 한 질이었는데 25만원이며 내가 받는 수당은 한 질 팔면 5만원이었다. 이 때 5만원은 상당한 돈이었다. 흑백텔레비 한 대 값이었다.
요리책을 팔고 다닐 때 여관에 조금 늦게 들어왔더니 주인이 전보왔다는 것이다.(그 때는 전화도 잘 안 되고 해서) 철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조금 늦게 돌아왔다. 내 방으로 들어가 있으니 여관방 아주머니가 기쁜 전보라면서 전해 주었다. 몇일전부터 애기 낳을 달인데 소식이 없어 궁금했다. 8월 30일 밤에는 아들 낳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회사에 나가니 동료사원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딸인가? 했더니 생남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으니 산파도 데리지않고 낳으려고 했으나 엄마가 약해서 보다 못해 외할머니께서 산파를 불러서 낳았다고 했다. 낳을 때는 너무 작고 눈을 뜨지않아 걱정이 되어서 엄마가 눈을 벌려보기까지 했으며 3일만에 겨우 눈을 떴다는 것이다.” 이것이 1976년 9월 2일 정오에 태어 난 철이의 유아 일지 첫 페지이다.
1개월 뒤인 10월 7일 아빠와 같이 살기 위해 육지로 나왔다.포항 부두에 가서 철이를 보니 아직도 조그만 했다. 강보에 싸인 채 택시로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와서 버스로 대구까지 왔다. 배도 처음 택시도 처음 버스도 처음 누구 보다도 일찍 배를 타보게 된 것이다. 철이는 계속 모유를 먹인 것이다.
철이와 같이 살 방을 얻다.
대현동 경북대 곁에 방 한 칸을 얻었다. 물론 부엌이 가적으로 내어단 조그만 방이었고 셋 가정이 한 집 안에 살게 되었다. 집주인은 대학강사이고 얼음공장하는 한 집과 우리가정이었다. 철이는 다행히도 모유가 많아서 모유만 먹고 자랐다. 나오고 6개월이 지난 후 때부터 철이를 유모차 (낡은)에 태워서 아침마다 햇볕을 쬐웠다. 그러나가 날씨가 따뜻해지자 머리에는 윗 옷을 벗겨서 머리에 감고 직사광광선을 피하게 해주었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는 박노식과 아들(박준규)이 하는 광고를 보고 첫 아이의 실패로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내가 매일 아침마다 유모차를 몰고 골목에 다녔다. 세일을 하다보니 출근은 9시쯤에 하여서 철이를 데리고 놀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동대구 역까지 가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 놀게도 하였다.
철이가 아주 튼튼하게 자라 주어서 1978년 M,B.C방송국에서 하는 우량아대회에 출전을 하였다. 300여명중 아버지 혼자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은 나 한사람뿐이었다. 대개 엄마 할머니 이모 고모 몇 사람씩 따라 왔으나 나는 나 혼자 갔다.
여러 가지를 검사하고 (신장 86cm 체중 13.5kg 가슴둘레 51cm 머리둘레49.5cm였다.)
점수로 환산한 것을 보니 90에서 97이란 숫자가 기록되어 있어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니 대단히 높은 수치여서 꼭 될 줄 알았다 나중에 발표를 보니 당선되지 못하였다
그 때 우두 맞은 자리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 상처가 있어서 전국대회에 못 나간 것 것 같아서 다음 날 대구시에서 하는 대회에 다시 데리고 나갔더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 오전에 끝 나지 않아서 배고품을 참고 기다려서 기어코 우량아 메달을 땄다
이 이후에도 가끔 감기는 했으나 병원에서 주사도 잘 맞고 간호원들이 주사놓을 때 궁둥이 크다고 내 궁둥이 만하다 하면서 손바닥으로 툭 치고 주사를 놓아 주었다. 큰 병없이 잘 자라 주었다. 1978년 6월 30일 엄마는 선혜를 낳으려고 조금 일찍이 울릉도로 가는데 나도 함께 갔다. 울릉도에 모기가 없는 데 어떻게 물려서 고생을 하였고 병원에서 주사도 맞았다. 그러다가 8월 6일 해수욕을 가서 여러 가지를 먹였는 데 아마 조개를 잘 못 먹었는지 식중독이 걸려서 약 15일정도 병원을 다니면서 주사를 맞고서 나아졌다. 저동에서 도동까지 업고 다니느라 고생을 좀 했다. 철이가 가장 많이 아팠던 때인 것 같다.이 이후에는 거의 병을 하지 않고 잘 자라주었다.
1978년 9월 2일 육지로 일하러나오다.
약 2개월간 섬에서 가족과 함께 있었으나 나는 일하기 위하여 혼자 9월 2일 대구로 나왔다. 나 혼자 생활하다보니 짐을 챙겨서 대현동인가 신암동인가 강남약국 뒤 옥탑방으로 옮겼다. 방이라야 한 편 남짓한 방에 밤에 잠만 자는 방이었다. 물론 화장실같은 것도 부엌도 없는 정말 방만 있는 요즈음 말하는 원룸이 아니었다. 일이라야 남의 물건 팔아주는 것이니 일자리는 언제든지 나만 원하면 있는 것이었다. 다시 한림출판사를 찾아서 사정이야기를 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그래도 나는 그런 일을 몇 년 하다보니 아는 사람도 생겨서 일자리는 당일에 얻어진다. 요즈음 말하면 학습지 돌리는 정도일까? 아침마다 걸어서 출근을 하고 버스비 왕복 60원씩 돼지저금통에 넣는 것은 잊지않았다. (나중에 흑백텔레비젼을 사게 된다)
일은 언제나 대구 시내를 목적지를 정해서 거기 까지는 버스로 가서 집집마다 문을 두두려서 방문하는 줄여서 가판(가정판매) 아니면 직판(직장의 사무실 판매)였다. 잘 팔리는 5-6질을 팔고 못파는 날은 한 질도 못 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꾸준히 하다보면 내 생활비는 벌었다.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 10월 26일 02시 30분 선혜가 태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딸이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딸을 함께 키울 수 있으니 말이다. 선혜는 1개월이 조금 지난 11월 말경 육지로 나왔다. 이 때 철이는 아빠를 잊어버리고 아빠곁에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조금 있으니 잘 따랐다. 다시 방을 얻어야 하는 데 이번에는 중동교 옆의 방을 하나 얻어서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중동교 너머에는 처제(정희)와 작은 처남(서울)이 학교(대구고등)에 다닌다고 또 조그만 방을 얻어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시장을 보려면 중동교를 넘어서 가는데 철이는 걷기고 선혜는 업고 가는 데만 20-30번 걸리는 시장을 보러 다니셨다. 이 때가 힘들었을 때이다. 아이들이 울면 운다고 주인이 야단해서 더욱 힘들었다. 대현동에서 철이 혼자 있을 때도 주인이 대학교수라고 떠들지마라고 해서 힘들었는데 어디가나 힘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국일보에 들어가서 한국일보에서 만든 책자를 팔다가 1979 년 4월에 우연히 신문에 보니 교사 채용시험이 있어서 시험을 쳐놓고 계속 일을 하다가. 5월31일자로 경산 임당초등하교로 임시로 발령을 받아서 가서 보니 월급임 86000원이어서 너무 적어서 안 한다고 포기서를 쓰고 집에 있으나 6월 1일자로 정식 발령이 났다고 오라고 해서 부임을 하고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6년을 이 일 저 일 잡일을 다 하다가 정착을 한 것이다. 이 때에 엄마는 매우 반대하셨지만 세일이란 것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서 교직에 들어간 것이다. 이 때 사실은 교사들의 봉급이 너무 적어 기피하던 시대이다. 교사 사표를 내고 중동쪽으로 돈 벌러 가던 시대이었으니 더욱이 경제파동이 있던 해였다. 그래서 장사는 더욱 안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들어 간 것이다. 임당학교에 발령을 받고 보니 중동에서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므로 수성구 범어동으로 다시 이사를 하였다.
또 다시 교수 집이었으나 그 집 아이가 집만 비우면 우리 방에 들어와서 돈을 훔쳐가서 한 번은 엄마가 숨어서 돈 훔쳐가는 것을 잡은 일도 있었다. 이 때 놀 자리가 마땅찮아서 철이
가 선혜를 데리고 대동교회까지 가서 놀고 했다. 그 때는 자동차 지금처럼 넓지않고 비포장이었으며 도로 가에는 하구가 복개되지않고 있어 쑥 민둘에 같은 것이 있었는데 가끔 철이는 먹는 풀이라면서 뜯어오고 하였다. 항상 선혜를 데리고 다녔다. 한 번은 대동교회에 가서 놀고 오다가 자동차가 와서 급히 건넌다고 그만 선혜의 신 한 짝을 도로에 두고 그냥 와서 엄마가 가서 찾아 온 일도 있었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다.
경산에 근무를 하기 때문에 버스 한 번 타는 범어동으로 이사를 왔으나 남의 셋집 방 한 칸에 부엌이라고 가적을 단 집에서 사니 아이들도 점점 커저서 방 한 칸이 적게 느껴졌다. 어떻게 내 집을 마련해보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하다가 마침 삼오 아파트가 바로 옆에 지어서 사기로 결정을 하고 시골에 내가 교사생활하면서 논 사놓았던것 팔고 한국일보대구지사에 근무할 때 책 팔아서 모은 돈 하고 합쳐서 1200만원하는 삼오아파트를 900만원은 현금을 주고 300만원은 담보대출을 내어서 샀다. 놀이기구가 별로 없을 때 삼오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놀다가 살지 않는다고 쫓겨온 철이가 우리도 이제 그 아파트 샀으니 가서 놀아도 되느냐? 된다고 했더니 이사도 하기전에 선혜를 데리고 매일 거기 가서 놀았다. 이사하던 날 골방(철이방)에 누워보니 대궐 같았다. 단칸골방에 살다가 방이 세 개나 되고 마루에다가 부엌이 따로 있고 배란다가 있어 물건 두기가 얼마나 편리한지 단칸방에서 그렇게 복잡하던 것이 삼오로 옮기니 물건이 모자랐다. 이 때도 부엌에서는 연탄으로 밥과 방을 데웠다. 배란다가 넓어서 꽃을 가꾸기 시작했고 그 때 기르던 군자란이 지금도 우리집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때부터 살림을 하나씩 사 모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농도 그 때 산 것이고 선혜의 조그만 농 컴퓨터 책상도 그 때 산 것이다. 그러면서 6만원짜리 흑백 (돼지저금통 깨어서 산) 텔레비전에서 칼라로 바꾸었다. 그랬더니 시청료 받으러 오는 사람이 칼라텔레비젼 있는 집을 조사하였다. 그 때는 KBS직원이 직접 시청료도 받으려고 조사를 하였다. 칼라가 나오고는 흑백은 시청료를 받지 않았으니까. 그 때 선혜가 우리집에도 칼라텔레비젼 있다고 자랑을 한 것이다. 남들은 칼라를 보는데 우리는 흑백을 보다가 겨우 샀으니 얼마나 좋으면 시청료 받으러 온 사람에게 자랑을 하였겠나. 하는 생각이 들엇다.
이렇게 커 보이던 집이 아이들이 자라서 중학교에 가니 집이 또 작아졌다. 이 때 집을 큰 곳으로 옮겨 주어야 되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내가 직접 집에서 살지 않고 영덕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이가 5학년 선혜가 3학년때 갔으니 그렇게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아버지가 집에 없이 영덕에서 7년을 보내고 내려오니 이미 철이는 서울에 가 있고 선혜도 훌쩍 커저셔 고등학생이 되어있었다. 영덕에서 철이 처음 고대 등록금 대출을 공제조합에 제출하니 교육청직원이 아들이 공부 잘 한다고 부러워하였다. 그리고 다시 경산현흥으로 발령을 받고 내려와서도 집에 있지않고 현흥학교사택(다 찌그러가는)에 거주를 하였다.여기서 또 5년간을 생식하면서 글씨 쓴다고 있다가 정평초등으로 전출을 하면서 집에 들어왔는데 이 때는 이미 선혜도 대학 3학년인가 되어있었다. 엄마가 새집으로 이사를 가자고 무척 졸랐으나 내 형편이 안 된다고 옮기지 않고 있다가. 2003년 11월인가 다시 지금 사는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철이의 성격이 집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한 창 사춘기에 내가 집에 없었고 편찮으신 어머님을 모시게 되어서 안 좋은 것을 보게 되었고 별이라는 아이가 있어서 특수한 가정이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거기에다 집이 작아 친구들 데려오기도 그랬을 것이고 아버지가 고지식하여 현대감각에 맞지 않아서 그랬을 것 같다.
아버지가 잘 기르려고 매우 노력은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잘 못 된 생각으로 너희들이 고생을 하게 된 것 같아 요즈음은 내가 잘 못을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잘 못 된 것은 너희들이 이제 스스로 옳은 길을 찾아서 가주기 바란다.
철이는 더욱이 제 2의 인생으로 태어났으니 앞으로 잘 살아 갈 줄 믿는다.
아버지 편지는 이것으로 줄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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