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천학교에서 3년
전입하자마자 6학년을 담임하게 되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을 그 때는 6학년을 서로 하려고 해서 새로 전입해온 선생에게는 주지 않던 시대임으로 동료들로부터 질투를 샀다.(6학년 담임을 해야 실력 있는 선생으로 인정을 받을 때였으므로) 사실은 내가 희망도 하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주어서 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보아주지 않았다. 4반까지 있어서 6학년 선생님도 세 사람은 전에 있던 사람이고 나만이 새로 온 사람이었다. 특히 6학년을 희망했는데도 담임을 하지 못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는데 이 사람들로 부터는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였다.
요즈음 말로 왕따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아예 희망을 4학년으로 하였다. 4학년 5학년은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학년이라 희망대로 4학년을 맡고 주임을 한 것이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경리담당자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내가 경리를 보게 되었다.
경리담당 직원이 돌아가신 다음날 점심시간에 하숙집에서 점심을 먹고 학교에 갔더니 4학년 주임선생 교무실로 오라는 교내방송을 듣고 갔더니 교감이 서류 한장을 내어놓는데 보니 업무분장표였다.
교사 한 분이 돌아가셨으니 새로이 업무를 분장하였는데 경리에 내 이름이 있었다. 당연히 거절을 하였으나 전임교에서 경리를 보았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기어코 하라고 하여서 마지못해 맡았다.
(그 때는 행정직원이 없고 교사가 경리도 하였다.)
당시 시험은 꾀 자주 치르었다. 전교생이 다달이 시험을 쳐서 그 결과를 발표하던 시대였다. 학년별로도 치고 학교 전체가 치기도 하고 군이나 도 전체가 치기도 하고 시험성적을 대단히 중히 여기던 때였다. 총각 때이니 아침마다 일찍 출근하여 문제지를 전체적으로 풀리고 모르는 것은 다시 풀고 학급에서는 거의 매일 시험을 치르었다.
학년 1등을 하면 커다란 수건을 주고 전교 1등을 하면 스텐레스 밥그릇을 한 벌 주었다. 다달이 치르는데 수건은 몇 번 타 보았는데 밥그릇은 타기가 매우 힘들었다. 기어코 타 보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4-6학년 까지는 채점을 하고 우리반이 1등했다고 소문이 나서 이 번에는 타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다음 날 치르는 1-3학년중 1학년 성적이 월등해서 또 못 타기를 여러 번 하였다.
4-6힉년중에는 1등을 하는데도 전교생이 같이 하기 때문에 1학년을 이기기는 매우 힘들었다.
4-6학년을 운동장에 불러내어 의자를 들고 나와 사방 1미터 간격으로 놓고 전교 선생님과 교장선생님 교감 모두가 나와서 지켜보는데서 치르었다. 채점은 교무실에 모여서 학년을 바꾸어서 하고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한꺼번에 치를 수 없어서 다음 날은 1-3학년이 같은 방법으로 치르는 것이다. 그래도 꼭 한 번은 전교 1등을 하고 싶어서 몇 달 만인가 기어코 한 번 1등을 하였다. 그 때 우리 반 평균이 예체능을 합하여 89. 얼마였던 것 같다. 드디어 1학년을 제치고 1등을 한 것이다 고학년에서 1등이 나오기는 처음이라고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 때 받은 밥그릇이 집에 있어서 우리 아이들이 밥을 받아 먹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 같다. 집사람은 그 밥그릇을 사용했으니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건천에서 3년을 보내고 1973년 3월 1일자로 포항시 동부초등학교로 전출을 하게 되었다.
'오작교의 행보 > 나는 누구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주 양남면 상계국교에서 2년간 근부 (1) | 2024.10.27 |
---|---|
(3) 제대 (0) | 2024.10.18 |
(2) 군 생활 (6) | 2024.10.13 |
11) 공군생활 (1)입대 동기(動機) (0) | 2024.10.07 |
울릉도에서 3년을 보내고 (0) | 2024.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