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교의 행보/나는 누구인가?

7) 중학교 생활 1학년

吳鵲橋 2024. 8. 15. 20:35

7) 중학교 생활

원래는 한 반을 60명씩 뽑았는데 들어가 보니 82명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때는 경제가 너무도 안 좋아서 선생님 1인당 몇 명씩 보결생(돈 받고 입학시켜주는 방법)을 배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의 친인척들과 부잣집 아이들을 입학시키다보니 한 반에 정원의 20명이상씩 되었다는 선배들의 말이었다. 나는 81번이었다. 호적상 생년월일이 늦어서 그렇게 되었다. 집에서 기차역까지 8KM를 걸어서 기차를 타고 30, 내려서 20분 정도 걸어서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때는 기차도 석탄으로 불을 피워서 물을 데워 나오는 증기의 힘으로 가는 기차라 자주 연착을 해서 학교에 도착하면 지각을 곧잘 했단다. ,여름,가을 까지는 통학을 하였고 1학년 겨울에는 아직 어리다고 진외조모(아버지의 외숙모)댁에 쌀 세 말씩 주고 하숙을 하였는데 진외조모댁도 엄청 못 사셨다. 안동역 앞의 판잣집이었는데 나무로 불을 때서 밥하던 시대라 나무를 사야 하지만 가난하다보니 안동역(당시는 철도국이어서 역이 매우 넓어 화물차들이 많이 다녔다)에 쌓아둔 춘양목(소나무)껍질을 벗겨서 말려 불을 피웠었다. 나도 학교를 마치고 일찍 오는 날은 나무껍질을 벗겨 보았는데 온 손에 송진(소나무진)이 묻어서 손이 시커멓게 된 일도 있었다. 전기도 30촉 이상은 켤 수 없어서 불이 희미하여 공부를 하는데도 책을 잘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당시는 전기가 부족하여 한전에서 전력이 많이 소모되는 100촉 전구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형광등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던 시대)

어떤 날은 진외조부 담배를 사러 가기도 하였는데 줄을 서야했다. 그것도 전번에 샀던 빈 담배봉지를 가진 사람에게만 한 봉지를 팔았다.

담배라야 희연이라고 하는 담뱃잎을 썰어 말려서 커다란 종이봉지에 담은 것이었는데도 잘 구할 수가 없었다. 4월 한 달을 진외조모 댁에서 생활을 하고 날씨가 좋아진 5월부터는 통학을 하였다. 늦은 가을이 되면서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날씨도 추워지면서 형님의 고등학교 시험공부에 도움이 되라고 형님이 자취하는 방으로 옮겼다. 형님 친구 한분과 셋이서 자취를 하는데 형님과 형님친구는 중학교 3학년이라 고등학교 시험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늘 밥 당번은 내가 하였다 당시 경안고등학교 뒷산이었는데 역시 판잣집으로 추운 겨울을 보냈다. 때로는 밥할 나무조차 없어서 주위에 있는 아카시아나무를 꺾어서 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형님은 안동농림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고 나는 2학년으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다음 학기에는 형님학교와 가까운 어개골이란 곳으로 자취방을 옮기게 되었다.

정말 어려운 1학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1학년 1학기 평균이 83점으로 82명중 11등을 하였더니 통학하는 선배들이 성적표를 보여 달라고 하여 보여주었더니(당시는 선배가 선생보다 더 무서워서 안 보여줄 수가 없었다)

! 이놈아 천재구나 통학하면서 83점을 받았으면 학교 가까이 집에서 다녔다면 90점은 받았겠구나고 놀림인지 칭찬인지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