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국민학교(초등학교) 생활
이렇게 자라서 1948. 9. 1 초등(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1회 졸업은 7월에 하였고 차츰 당겨져서 내가 졸업할 때는 3월이었다.
9월에 입학해서 3월에 졸업을 했으니 나는 5년 6개월만 초등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 처음으로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그 당시에는 교과서도 돈을 주고 사야 했는데 국어책과 셈본(수학)책 정도만 사고 나머지 과목의 교과서는 거의 사지 못 하였다. 가난하여 국어책도 못 사는 아이도 있었으니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가?
교과서를 주문하여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1학년 2학기는 교과서 없이 공부를 한 기억이 난다.
어른들이나 우리도 공부라고 하면 국어나 수학만을 공부인줄 알 정도였다.
우리 집은 겨우 밥도 못 먹고 살 정도로 가난하였던 것 같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무렵이면 배추뿌리를 삶아서 한 뿌리씩 나누어 먹는 것이 식사였고 때로는 묵나물 죽이라고 나물이 쌀보다 많은 죽을 한 그릇 먹었다. 그래도 우리는 잘 먹고 사는 형편이었다.
동네의 절반 이상은 점심은 아예 굶었고 어떤 집 아이는 먹을 것이 없어서 흙벽을 뜯어먹는다는 소문도 들으며 자랐다
한 학년이 한 반 뿐이어서 전교생을 거의 알게 되었고 더욱이 형님이 3학년이라 형님친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막내 고모는 5학년으로 우리학교가 설립되고 1회생이었는데 고모의 친구들이 무척 귀여워해주었다.
특히 이진원이란 친구의 누나(이경숙)도 막내고모의 친구였는데 집에 연락도 없이 그 집에 가서 자기도 하였다.
그런데 집에서는 찾지도 않는 것 같았다. 호랑이도 없고 시골이라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어서인지 걱정을 아예 하시지 않았었다.
1학년 학생수가 40여명 정도 되었는데 선생님도 부족하고 교실도 부족하여서 한 선생님이 2개 학년을 담임하였고 수업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한 주일은 오전 다음 한 주일은 오후 수업, 이렇게 주일마다 번갈아 받았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에 오전반인 줄 알고 학교에 가보면 오후 반일 때는 종일 학교에서 놀다가 오후 수업을 받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는 오전반인데 오후반인 줄 알고 학교에 가지 않고 있다가 친구들이 데릴러 와서 함께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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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때 담임은 교장선생님(당시는 교장도 담임을 하였음)이었는데 출장을 자주 가다보니 출장을 가면 선배학년 형들이 와서 가르쳐주었다. 가르친다는 것이 그저 국어책이나 읽히고 수학문제(덧셈.뺄셈) 칠판에 적어놓으면 풀고 하는 정도였다.
교실이 부족하여 2학년 때는 잠실(누에 기르는 방)에서 책상도 없이 가마니(짚으로 짠 곡식을 넣던 도구)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서 공부를 하였다.
잠실은 일제강점기 때의 학교였을 때 학생들이 실습을 한다고 누에고치를 기르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우리학교는 일제강점기시대 세워졌으나 간이학교라고 4학년까지만 있었는데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정식학교(공립국민학교)로 승격이 되었다.
2학년 때부터 반장을 해서 6학년 졸업할 때까지 계속 반장을 한 것이다.
성적표를 보면 당시는 3학기까지였는데 평균이 93점 정도 되었던 것 같고 어떤 학기 때는 98점일 때도 있었고, 6학년 때는 학교 전체의 일을 맡아서 한 적이 많았다.
그러다가 3학년 때 6.25전쟁이 나서 학교는 폭격을 맞아 가운데가 내려앉아 한 쪽 벽은 막지도 못한 채 한 해 겨울을 공부하기도 했단다. 창문은 물론 없었지 눈이 오면 창문 쪽에서 눈이 펄펄 날아들기도 하였으나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교실이 완전히 타 없어진 학교도 있었으니 그런 학교는 동네마다 학년별로 한 동네에 모여서 공부했단다. 여름에는 나무 밑에서 공부하고 겨울에는 동네 정자(집) 같은 곳에서 공부 했단다. 참으로 어렵게 어린 시대를 보냈지. 여름이면 산에 가서 소나무 가지를 꺾어 와서 학교지붕을 온통 덮기도 했단다. 적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한 번은 산에 소나무가지 하러 갔다고 엄청난 실탄을 주워서 상급학년에게 빼앗기기도 했단다. 전쟁 중에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12월만 되면 국군아저씨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위문편지를 쓰는 것이 연중행사였고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단다.
교실도 제대로 없고 겨울에는 추워서 집집마다 장작을 가져와서 난로를 피웠다.
난로가에 서로 앉으려 하였고 그래서 자리를 돌아가면서 앉은 것 같았다.
3학년이 되면서 오후 수업이 있을 때의 점심시간에는 집이 가까우니 집에 뛰어오면 나물 죽 한 그릇이 기다리고 있었다. 봄에 해서 말려 놓은 나물로 죽을 쑨 것이다. 아마 거의 매일 한 끼는 죽이었지 싶다.
그래서 탁이(서울 삼촌)가 서울에 발령을 받고 나에게 편지를 쓴 처음의 글이 우리가 어릴 때 먹은 묵나물 죽 이야기가 나왔더라. 다른 집도 다 묵나물 죽을 먹는 줄 알았다고...
오전 오후반이 있었는데 오후반이 되면 집 앞의 논에서 짚 공으로 축구를 하기도 하고 여름이면 개구리를 잡아 솥에 삶아 먹기도 하였다.
5학년 때 실기 대회에 처음 참가하게 되어서 습자(서예)에 내가 나가고 다른 아이들은 그리기 글짓기에도 나갔는데 내가 서예에 2등을 하였고 2학년이던 교장 딸이 그리기에 입상을 한 것이 우리학교가 대외(학교밖)에 나가서 상 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 때 쓴 글씨는 안동교육구청만세란 8자를 두 줄 세로로 썼는데 그 작품은 교육청에 전시를 하고 돌려받은 것 같은데 지금은 없어지고 그 때 받은 습자 상장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 담임이 새로 오셨는데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신 새파란 20세정도 되는 김동율이란 분이었는데 집은 한 면내인 소호리란 곳이 집이었는데 어느 토요일에 집에 가셨다가 오시면서 병아리를 20여마리 사 오셨다. 수학여행 갈 때 보탬이 된다고 기르게 하였다.
시골이다 보니 수학여행도 제대로 갈 수 없었던 시대이다. 수학여행을 가면 쌀을 2되씩 모두어서 그것을 여관에 주고 하룻밤 자고 세끼 밥을 먹고 하던 시대였다.
어쨌든 병아리를 잘 기르겠다고 각자 자기 집에서 싸래기(쌀을 찧으면 부셔져서 아주 작게 된 쌀)를 가져와서 주기도 하여 잘 컸다. 조금 커서는 평팔 1동 못에 가서 올챙이를 잡아와서 주기도 하였는데...
큰 닭이 되었을 때는 한 마리만 남았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 어린이들의 몫이 못되고 어느 날 선생님들이 잡아서 술안주로 하셔버렸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도 학교에서 놀다가 집에 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들이 우리 닭을 잡는 것을 목격하였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만약 아이들이 알면 우리 닭 선생님들이 잡아먹었다고 소문이 나면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도 들었다.
그 이외에 토끼도 길러서 새끼까지 낳았는데 성공하지는 못 한 것 같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 6학년을 마치고 중학교 시험을 치르는데 원서 값을 낼 형편이 못되어서...
형님만 중학교에 가고(맏이만 공부시키는 풍속) 집에서 농사나 지어라고 하셔서 울고불고 해서 겨우 한 학교(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만 원서를 낼 수 있었다. 그것도 떨어지기를 바라면서...지금까지 우리학교에서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6학년 때 전국적으로 국가고시를 치르는데 우리학교에서 못 치르고 면 소재지 학교에 가서 치른 것 같다.
그 성적으로 중학교에 원서를 내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요즈음 말하면 수능 시험 같이 말이다. 우리학교는 규모가 작아서 무슨 행사는 꼭 큰 학교인 면소재지 학교에 가서 하였다.
처음에는 그 성적(국가고시)으로만 한다고 했는데 다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안동사범병설중학교는 특차로서 경북북부지방에서는 가장 좋다고 하는 학교였으니 각 군마다 내 노라 하는 학생만 시험을 치르게 되는 데 무려 8:1이었다.
시험을 치르고 담임선생님이 1차인 안동중학교에 원서를 내라고 하는 것을 나는 안 낸다고 하니 담임이 특차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해서 담임이 원서를 내어 주셨다. (시험은 치르지 않았다. 특차인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 합격하였으니까)
특차인 안동사범병설중학교 입학시험 치기 전 날 혼자서 기차를 타고 안동 중학교 옆에 자취를 하는 형님을 찾아 갔다
집에서도 걱정을 하고 나도 걱정이 되었으나 당시는 사람들이 적어서 말만 듣고 안동중학교 뒤쪽에서 자취하는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요즈음처럼 많은 집이 있었으면 못 찾았겠지만 안동읍(당시는 읍이었다) 안동 사람이면 다 아는 안동중학교라는 큰 건물 옆에 띄엄띄엄 10여채씩 있으니 물어물어 찾아갔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시원하게 낙동강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오라고 해서 걸어서 30분 쯤 가니 조그만 도랑이 있어 그것이 낙동강인 줄 알고 세수를 하고 왔더니 그것은 물도랑이고 그 넘어서 낙동강이 있다는 것이었다. 안동병설중학교는 형님 자취방에서 거의 1시간 거리에 있었으나 형님 설명을 대충 듣고 유명한 학교이다 보니 시험치르는 날이라 여러사람이 가는 곳으로 가면 된다고 하여 역시 물으면서 찾아갈 수 있었다. 어쨌든 시험을 치르고 한 달 후에 합격발표를 하는 날 결과를 보러 또 나 혼자 갔었다. 그 때는 두루마리 종이에 붓으로 써서 벽에 길게 붙였는데 처음부터 차례로 훑어보니 한 참 걸렸는데 끝에서 20번째 쯤 내 이름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특차인 중학교에 합격을 했다고 난리가 났다. 우리 면에서는 세 사람 큰 학교인 면소재지학교에서 두 사람 그리고 우리학교에서 나였다. 시험 자체를 나만 쳤으니까 어렵다고 다른 아이들은 원서를 내지 않았었다.
우리학교가 생기고 처음으로 특차인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 합격하였다고, 공부 잘 한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입학금이 비싸서 또 학교에 못 갈 것 같이 되었는데 담임과 교장이 우리 집에 몇 번씩 찾아와서 우리학교 개교 이래 첫 합격한 아이라서 꼭 입학을 시켜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여서 송아지를 팔아서 입학금을 내었다. 이 송아지도 남의 소를 길러주고 그 대가로 얻은 송아지인데...
이 송아지를 어미 소로 만들어서 농사일에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그만 팔아서 입학금으로 내어버렸으니 또 다시 남의 어미 소를 길러야 했다.
이 때부터 우리 집은 남의 소를 길러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아버지에게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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