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에서(글씨)

임서를 하기 시작

吳鵲橋 2017. 9. 12. 20:49



임서를 하기 시작


문방사우를 준비하고 나서 구성궁예천명을 익히면서 처음으로 전지 한 장에 절임을 하여보았다.
그 다음에는 2*7지에 써서 대구시 학원 연합전에 출품을 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 법첩을 한 권씩 익히면서 절임을 해 보았던 것이다.
절임을 할 때는 서문시장이나 염매시장 포목점에 가서 광목을 떠 와서 모전을 만드는데 글자의 수에 따른 줄을 긋는 일을 한다. 그것도 잘 못하여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다.
행서가 서예의 꽃이라고는 하나 나는 차근차근 해서(댱해,육조해), 예서, 전서를 써보고 행서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아마 그 때의 공모전 규격이 200* 70이어서 그 크기에 맞추어서 연습한 것 같다.
내가 글씨를 연습할 때는 2,*7지가 따로 나온 것이 없어서 전지 한장에 반절을 붙여서 썼다.
붙인 자리가 되도록 표시가 나지 않게 붙여야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것을 잘 할 줄 몰라서 동료(주로 소천 김영옥)들이 만들어 주었다.
그 때의 동료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구성궁 예천명,화도사비(구양순) 다음에 익힌 것이 공자 묘당비(우세남) 같다.

구성궁 예천명 (2*7지) (처음으로 대구시 학원 연합전시회 출품작)

공자묘당비

구성궁 예천명을 어느 정도 임서하고는 공자묘당비(우세남)를 썼다.
공자묘당비 (2*7지)(승묵회원전)
 


예서는 장천비로 시작하였다.

예서는 장천비가 좋다는 말을 듣고 장천비부터 시작하여 예기비.을영비, 사신비 등을 써 보았다.
장천비 절임(2*7지)

예기비 절임(2*7지)

임신서기석.

예서를 대충 마무리하고 나서
'壬申誓記石'이란 탁본을 보고 글 내용이 좋아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한 번 써보기로 하였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壬申誓記石이란? (내용은 퍼옴 )
길이 약 34㎝, 윗너비 11㎝. 1934년 경주군 현곡면(見谷面) 금장리(金丈里)에서 발견되었다. 두께 약 2㎝의 돌에 대략 1㎝ 정도 크기의 문자 74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는 뾰족한 송곳 같은 것으로 다소 거칠게 새겼는데, 모두 5행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행의 글자수는 10~18자로 고르지 않다. 글자가 새겨진 면은 위가 약간 넓고 아래로 갈수록 좁은 모양을 했다. 신라시대의 청년으로 짐작되는 두 사람이 학문을 닦고 힘써 실천할 것을 맹세한 내용으로 일종의 금석문서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고 기록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忠道)를 지니고 지키며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져도 모름지기 실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지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기를 시(詩)·상서(尙書)·예(禮:禮記)·전(傳:春秋左傳)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이 서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즉 하나는 임신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1년 전인 신미년에 행한 것이다. 신미년에 행한 서약은 유학 경전의 학습이 주된 내용이고, 임신년의 것은 장차 실천궁행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이 두사람은 신미년에서 시·상서·예기를 학습할 것을 맹세했으나 실제로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다음해에 다시 한번 이전의 서약을 확인하면서 3년 후에는 실천궁행할 것까지도 함께 맹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고 임신년과 신미년도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시경〉·〈상서 尙書〉·〈예기〉·〈춘추좌전 春秋左傳〉 등이 신라시대 국학(國學)의 주요학과목이라는 점에 착안해 작성연대를 국학이 설치된 이후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학사상과 유학서적이 수용되고 학습이 이루어진 것은 보다 훨씬 이전이며, 새겨진 문체나 글자체가 〈남산신성비 南山新城碑〉(591)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삼국통일 이전인 552년(진흥왕 13) 또는 612년(진평왕 34)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내용상 두 사람은 청년으로 짐작되므로 화랑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화랑의 활동이 융성하던 통일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퍼옴)
壬申誓記石(臨書 全文 2*7지)
인신서기석의 탁본(내가직접 한 것은 아니고 친구에게서 얻은 것이다.)
이 탁본을 보고서 글씨를 썼던 것이다.
임신서기석의 사진
길이 약 34㎝, 윗너비 11㎝. 1934년 경주군 현곡면(見谷面) 금장리(金丈里)에서 발견되었다. 두께 약 2㎝의 돌에 대략 1㎝ 정도 크기의 문자 74자가 새겨져 있다.

행서는 난정서와 집자성교서를 썼다.

唐解와 六朝解, 石鼓文, 隸書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고 行書에 입문을 하게 되었다.
행서는 왕희지의 蘭亭書로 시작하였다.
나는 그 때까지 난정서가 왕희지의 진본인줄만 알았는데 막상 쓰려고 법첩을 대하고 보니 사본(임모본)이었다.
당태종이 소익을 시켜 중 변재로부터 훔쳐와서 당대의 서가(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들에게 임모를 시켰고 동시에 탑서인(조모,한도정,빙승소,등)에게는 탑모케 하였다는 것이다. 진본은 무덤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가지가 있는 중 내가 택한 법첩은 '신용반인본'이었다.
卷頭와 卷尾에 神龍印이 半印으로 되어 있어서 神龍半印本 혹은 神龍印本이라고 한다고 한다.
憑承素摹라고 하나 系統的으로는 저수량계에 포함한다고 한다.
난정서 절임 (전지 135*70)
 

성교서를 끝내고는 작품을 하나씩 해보았다.

가로 70cm * 세로 200cm (오당지)
踰水落山腰(유수락산요)-朴泰輔(박태보)호는 定齋
수락산 허리를 넘으며-朴泰輔(박태보)
溪路幾回轉(계로기회전) : 골짜기 길 몇 번을 돌아
中峰處處看(중봉처처간) : 산봉우리 여기저기 바라보노라
苔巖秋色淨(태암추색정) : 이끼 낀 바위에는 가을빛 맑고
松籟暮聲寒(송뢰모성한) : 솔바람 소리, 날 저물어 더욱 차구나
隱日行林好(은일행림호) : 해 가린 숲길은 걷기에 좋고
迷煙出谷難(미연출곡난) : 자욱한 안개에 골짜기 벗어나기 어렵네
逢人問前路(봉인문전로) : 사람을 만나 길을 물으니
遙指赤雲端(요지적운단) : 멀리 붉은 구름 끝 가리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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