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27년에 산, 이문열의 금시조를 다시 읽어보았다.
실존 인물을 한 자씩 바꾸어서 소설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는 말을 듣고 내 나름대로 대치시켜보았다.
주인공인 고죽은 죽농 서동균
고죽의 선생인 석담은 석재 서병오
고죽의 문하생인 초헌 김군은 소헌 김만호
고죽의 여제자인 옥교는 향사인 것 같다.
향사는 소설에서 보면 근교에서 서실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포항인 것 같다.
내가 영덕에 있을 때 포항에 들렸다가 시간이 남아서 향사란 분을 만나보기 위해 향사서실을 찾은 적이 있다. 동료선생이 향사를 극찬하기에 한 번 작품도 보고 사람도 보기위해 서실에 들렸더니 죽농선생의 대나무 그림과 난 그림 글씨 한 폭씩 있었다. 한 눈에도 제자가 아니었으면 죽농의 작품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한 참 감상을 하고 있는 데 향사의 제자들이 나 보고 자꾸 물었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그래서 선생님이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뵈오려 왔다고 했더니 선생님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다. 죽농선생의 수제자로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선생님을 뵈올 수 없느냐 하니 기다리면 올 것이라 해서 한 시간쯤, 내어 주는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니 오셨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는 훤칠하게 큰 것 같았다. 선생님의 훌륭한 소문을 듣고 서실을 보러 왔노라고 하니 한 참 동안 죽농선생의 이야기를 하였다. 대구에 와서 서산선생님께 포항에서 향사란 분을 만나보았다고 하니 그 분이 바로 죽농선생의 애인이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래서 향사가 소설속의 옥교임을 짐작한다.
소설중 운곡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분인 것 갇다.
소설을 쓴 이문열씨는 웬만한 서예가보다도 많은 서예이론을 알고 있다. 소설가란 다방면으로 아는 것이 많아야 되는 모양이다. 내가 교직을 사표내고 돌아다닐 때 MBC드라마작가인 김교식씨를 만나 본 적이 있는데 역시 많은 사회상을 알고 있었다.
실존 인물을 한 자씩 바꾸어서 소설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는 말을 듣고 내 나름대로 대치시켜보았다.
주인공인 고죽은 죽농 서동균
고죽의 선생인 석담은 석재 서병오
고죽의 문하생인 초헌 김군은 소헌 김만호
고죽의 여제자인 옥교는 향사인 것 같다.
향사는 소설에서 보면 근교에서 서실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포항인 것 같다.
내가 영덕에 있을 때 포항에 들렸다가 시간이 남아서 향사란 분을 만나보기 위해 향사서실을 찾은 적이 있다. 동료선생이 향사를 극찬하기에 한 번 작품도 보고 사람도 보기위해 서실에 들렸더니 죽농선생의 대나무 그림과 난 그림 글씨 한 폭씩 있었다. 한 눈에도 제자가 아니었으면 죽농의 작품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한 참 감상을 하고 있는 데 향사의 제자들이 나 보고 자꾸 물었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그래서 선생님이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뵈오려 왔다고 했더니 선생님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다. 죽농선생의 수제자로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선생님을 뵈올 수 없느냐 하니 기다리면 올 것이라 해서 한 시간쯤, 내어 주는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니 오셨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는 훤칠하게 큰 것 같았다. 선생님의 훌륭한 소문을 듣고 서실을 보러 왔노라고 하니 한 참 동안 죽농선생의 이야기를 하였다. 대구에 와서 서산선생님께 포항에서 향사란 분을 만나보았다고 하니 그 분이 바로 죽농선생의 애인이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래서 향사가 소설속의 옥교임을 짐작한다.
소설중 운곡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분인 것 갇다.
소설을 쓴 이문열씨는 웬만한 서예가보다도 많은 서예이론을 알고 있다. 소설가란 다방면으로 아는 것이 많아야 되는 모양이다. 내가 교직을 사표내고 돌아다닐 때 MBC드라마작가인 김교식씨를 만나 본 적이 있는데 역시 많은 사회상을 알고 있었다.
★. 추사의 서결부터 붓, 먹, 벼루까지 상세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웬만한 서예가를
능가하는 이론을 익히고 있다.
석재선생은 죽농을 제자로 받아드리면서
맨 먼저 해자부터 시작할 때
"붓을 쥐기 전에 먼저 추사의 서결을 외우도록 하였다."
추사의 서결은 "글씨가 법도를 삼아야 할 것은 텅 비게 하여 움직여 가게 하는 것이다. 마치 하늘과 같으니 하늘은 남북극이 있어서 그것으로 굴대를 삼아 그 움직이지 않는 곳에 잡아매고 그런 후에 그 하늘을 항상 움직이게 한다. 글씨가 법도로 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글씨는 붓에서 이루어지고 붓은 손가락에서 움지여지며 손가락은 손목에서 움직여지고, 손목은 팔뚝에서 움직여지며, 팔뚝은 어깨에서 움직여진다. 그리고 어깨니 팔뚝이니 팔목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 오른쪽 몽둥아리라는 것에서 움직여진다. 또한 오른쪽 몸둥아리는 곧 그 왼쪽 몸뚱아리에서 움직여지는데 왼쪽과 오른쪽 몸뚱아리라는 것은 몸뚱아리의 위쪽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윗몸뚱아리는 곧 아랫몸뚱아리에서 움직여지는데 아랫몸뚱아리라는 것은 두 다리다. 두 다리가 땅을 딛는 데 발가락과 뒷꿈치가 아래를 걸어당기어 나막신 굽이 땅에 박히는 것처럼 하면 이것은 아랫몸뚱아리가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랫 몸뚱아리가 충실해져야만 그 이후에 그 윗몸뚱아리의 텅 빈 것을 움직여 갈 수 있다. 그러나 윗몸뚱아리도 역시 그 충실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왼쪽 몸뚱아리를 충실하게 해야 한다, 왼쪽 몸뚱아리는 엉겨붙듯이 책상에 기대서 아래와 거듭 서로 이어져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세 몸뚱아리가 충실해지면 오른쪽 한 몸뚱이의 빈 것을 움직여 나갈 수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 한 몸뚱아리라는 것은 지극히 충실해지게 된다. 그런 뒤에 어깨로서 팔뚝을 움직여 나가고 팔뚝으로 말미암아 손목을 움직여 나가며 손목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나가는데 모두 각각 지극히 충실함으로써 지극히 텅 빈 것을 뭄직여 나가게 된다. 비었다는 것은 그 형태이고 충실하다는 것은 그 정기다 그 정기라는 것은 세 몸뚱아리의 충실한 것이 지극히 빈 가운데에서 무르녹아 맺힌 것이다. 오직 그 충실한 까닭으로 힘이 종이를 뚫고 그 빈 까닭으로 정기가 종이에 밝게 배어나온다. "
한 자 빠뜨리지않고 다 외웠을 때 법첩(안진경) 한 권을 내어주면서
"이것을 백 번을 쓰면 본은 될 것이고, 천 번을 쓰면 잘 쓴다 소리를 들얼 것이며, 만 번을 쓰면 명필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먹의 종류로는 고매원이니 용상봉무니 하는 대단한 먹들의 이름이 나오고 벼루로는 단계연이 나온다. 연진에 먹물 한 방울 튀기지않고 묵지가 차자 선생은 필낭에 수숩하고 남긴 붓과 귀한 화선지를 꺼냈다.
"아침에 붓을 쥐기 시작하여 저녁에 자기 솜씨를 자랑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환쟁이를 제자로 기른 적이 없다" 라고 제자를 꾸짖는 말을 보면 요즈음 서예가들이란 환쟁이에 가까운 이가 얼마나 많은가? 문자향 서권기가 없다.
"글을 씀에 그 기상은 금시조가 푸른 바다를 쪼개고 용을 잡아올리듯 하고 그 투철함은 향상이 바닥으로부터 냇물을 가르고 내를 건너듯 하라" (金翅碧海香象渡河)
沙板이나 粉板에 연습을 하였다.
서예하는 사람도 아마 사판 분판을 잘 모를 터인데
사판은 모래판이고 분판은 조개가루와 아교를 먹여서 칠한 나무판이다.
왕희지의 '非人不傳'이란 말도 나온다.
사람 같지 않는 서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
점획을 모르고도 결구가 되며 열두 필법을 듣지않고도 조정과 포백과 사전을 안다.
자사초의 난은 뿌리가 들어나지 않는 것이 없다.
석재선생은 글씨는 힘을 중시하고 기와 품을 숭상하였다. 그러나 고죽은 아름다움을 중히 여기고 정과 의를 들어내자고 힘썼다.
物에 충실하기로는 거리에 나앉은 화공이 훨씬 앞선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이 서 푼에 팔려 나중에 땅바닥 뚫어진 것을 메우게 되는 것은 뜻이 얕고 천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림이며 글씨 그 자체에 어떤 귀함을 주려고 하지만 만일 드높은 정신의 경지가 곁들여 있지 않므면 다만
능가하는 이론을 익히고 있다.
석재선생은 죽농을 제자로 받아드리면서
맨 먼저 해자부터 시작할 때
"붓을 쥐기 전에 먼저 추사의 서결을 외우도록 하였다."
추사의 서결은 "글씨가 법도를 삼아야 할 것은 텅 비게 하여 움직여 가게 하는 것이다. 마치 하늘과 같으니 하늘은 남북극이 있어서 그것으로 굴대를 삼아 그 움직이지 않는 곳에 잡아매고 그런 후에 그 하늘을 항상 움직이게 한다. 글씨가 법도로 삼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글씨는 붓에서 이루어지고 붓은 손가락에서 움지여지며 손가락은 손목에서 움직여지고, 손목은 팔뚝에서 움직여지며, 팔뚝은 어깨에서 움직여진다. 그리고 어깨니 팔뚝이니 팔목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 오른쪽 몽둥아리라는 것에서 움직여진다. 또한 오른쪽 몸둥아리는 곧 그 왼쪽 몸뚱아리에서 움직여지는데 왼쪽과 오른쪽 몸뚱아리라는 것은 몸뚱아리의 위쪽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윗몸뚱아리는 곧 아랫몸뚱아리에서 움직여지는데 아랫몸뚱아리라는 것은 두 다리다. 두 다리가 땅을 딛는 데 발가락과 뒷꿈치가 아래를 걸어당기어 나막신 굽이 땅에 박히는 것처럼 하면 이것은 아랫몸뚱아리가 충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랫 몸뚱아리가 충실해져야만 그 이후에 그 윗몸뚱아리의 텅 빈 것을 움직여 갈 수 있다. 그러나 윗몸뚱아리도 역시 그 충실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왼쪽 몸뚱아리를 충실하게 해야 한다, 왼쪽 몸뚱아리는 엉겨붙듯이 책상에 기대서 아래와 거듭 서로 이어져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 세 몸뚱아리가 충실해지면 오른쪽 한 몸뚱이의 빈 것을 움직여 나갈 수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 한 몸뚱아리라는 것은 지극히 충실해지게 된다. 그런 뒤에 어깨로서 팔뚝을 움직여 나가고 팔뚝으로 말미암아 손목을 움직여 나가며 손목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나가는데 모두 각각 지극히 충실함으로써 지극히 텅 빈 것을 뭄직여 나가게 된다. 비었다는 것은 그 형태이고 충실하다는 것은 그 정기다 그 정기라는 것은 세 몸뚱아리의 충실한 것이 지극히 빈 가운데에서 무르녹아 맺힌 것이다. 오직 그 충실한 까닭으로 힘이 종이를 뚫고 그 빈 까닭으로 정기가 종이에 밝게 배어나온다. "
한 자 빠뜨리지않고 다 외웠을 때 법첩(안진경) 한 권을 내어주면서
"이것을 백 번을 쓰면 본은 될 것이고, 천 번을 쓰면 잘 쓴다 소리를 들얼 것이며, 만 번을 쓰면 명필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먹의 종류로는 고매원이니 용상봉무니 하는 대단한 먹들의 이름이 나오고 벼루로는 단계연이 나온다. 연진에 먹물 한 방울 튀기지않고 묵지가 차자 선생은 필낭에 수숩하고 남긴 붓과 귀한 화선지를 꺼냈다.
"아침에 붓을 쥐기 시작하여 저녁에 자기 솜씨를 자랑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환쟁이를 제자로 기른 적이 없다" 라고 제자를 꾸짖는 말을 보면 요즈음 서예가들이란 환쟁이에 가까운 이가 얼마나 많은가? 문자향 서권기가 없다.
"글을 씀에 그 기상은 금시조가 푸른 바다를 쪼개고 용을 잡아올리듯 하고 그 투철함은 향상이 바닥으로부터 냇물을 가르고 내를 건너듯 하라" (金翅碧海香象渡河)
沙板이나 粉板에 연습을 하였다.
서예하는 사람도 아마 사판 분판을 잘 모를 터인데
사판은 모래판이고 분판은 조개가루와 아교를 먹여서 칠한 나무판이다.
왕희지의 '非人不傳'이란 말도 나온다.
사람 같지 않는 서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
점획을 모르고도 결구가 되며 열두 필법을 듣지않고도 조정과 포백과 사전을 안다.
자사초의 난은 뿌리가 들어나지 않는 것이 없다.
석재선생은 글씨는 힘을 중시하고 기와 품을 숭상하였다. 그러나 고죽은 아름다움을 중히 여기고 정과 의를 들어내자고 힘썼다.
物에 충실하기로는 거리에 나앉은 화공이 훨씬 앞선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이 서 푼에 팔려 나중에 땅바닥 뚫어진 것을 메우게 되는 것은 뜻이 얕고 천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림이며 글씨 그 자체에 어떤 귀함을 주려고 하지만 만일 드높은 정신의 경지가 곁들여 있지 않므면 다만
검은 것은 먹이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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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는 道의 香이며 法은 道의 옷이다. 道가 없으면 藝도 法도 없다.
"붓 쥐는 법도 익히기 전에 행서를 휘갈기고 , 점획 결구도 모르면서 초서며 전서까지 그려대는 요즈음 젊은이들 답지 않게 초헌은 스스로 정서로만 삼년을 채웠다.
고죽이 마지막으로 자기의 작품을 모두어서 불태우면서 하는말
고죽이 마지막으로 자기의 작품을 모두어서 불태우면서 하는말
"나는 저것들로 일평생 나를 속이고 세상 사람들을 속여 왔다. 이것들을 남겨두면 뒷사람까지도 속이게 된다."
요즈음 서예가들이 고죽의 말처럼 생각하고 글씨를 쓰는 분이 몇 분이나 될까?
내가 가지고 있는 도록 1
★.내 이름 석 자가 올라 있는 도록
내가 교직생활에서 잠시(7년) 외도를 하고 4212년 6월 1일자로 다시 복직을 하였을 때 승진을 하려고 생각하니 거리가 멀었다. 15년 후배와 점수가 같았다. 그래서 승진을 포기하고 남들이 승진공부할 때 무엇인가를 하여야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서예였다. 서예는 취미도 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군 대회에서 상을 탄 경험도 있어서 서예의 본질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우선 우리집 가까이에 있는 서실을 찾았으나 한 달만에 그만 두었다. 내가 생각하는 서예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구의 중심지인 '한울 서실'에서 6개월을 공부해보니 그것도 아니어서 서울에 있는 '죽봉 황성현'씨의 체본을 받아서 하는 우편공부를 2년 하다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아 대구의 서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알아보다가 '서산서실'에서 배우기로 하였다. 서예의 본질을 공부한지 7년만에 대구의 서예학원 합동전시회가 있다하여 난생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하였다.
★.대구시 서예학원 연합회 합동전 ( 4319,6.15~6.19 )
대구시민회관 대. 소 전시실
내가 교직생활에서 잠시(7년) 외도를 하고 4212년 6월 1일자로 다시 복직을 하였을 때 승진을 하려고 생각하니 거리가 멀었다. 15년 후배와 점수가 같았다. 그래서 승진을 포기하고 남들이 승진공부할 때 무엇인가를 하여야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서예였다. 서예는 취미도 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군 대회에서 상을 탄 경험도 있어서 서예의 본질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우선 우리집 가까이에 있는 서실을 찾았으나 한 달만에 그만 두었다. 내가 생각하는 서예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구의 중심지인 '한울 서실'에서 6개월을 공부해보니 그것도 아니어서 서울에 있는 '죽봉 황성현'씨의 체본을 받아서 하는 우편공부를 2년 하다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아 대구의 서실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알아보다가 '서산서실'에서 배우기로 하였다. 서예의 본질을 공부한지 7년만에 대구의 서예학원 합동전시회가 있다하여 난생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하였다.
★.대구시 서예학원 연합회 합동전 ( 4319,6.15~6.19 )
대구시민회관 대. 소 전시실
★. 이 때는 아직 호가 없어 이름만 기록
★. 참여한 학원 이름
★. 학원장들의 이름
★. 복초헌 서실의 회원전 도록
★. 이 때부터 昔圃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육조(원상조상기)외 2작품
★. 공모전이라고는 처음으로 출품하여 입상을 하였다.
★. 절임북해왕원상조상기
★. 서산선생님의 제자중 경력이 조금 된 남자만 16명
★. 공자 묘당비 절임
★. 관에서 주관하는 대회는 경북도전만이 있을 때
★. 경북도전 도록에는 작품은 우수상 이상만 싣고 입상자는 명단만 만들었다.
★.고운선생시 (추풍유고음...)
이 작품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였는데 그 때 마침 가족과 함께 서울을
갔다가 전시회를 관람하려고 갔더니 입장료를 내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내 작품을 내가 보는데도 입장료를 내어야 되느냐?고 했더니 이름이 무엇이냐고
해서 오상인이라고 했더니 그런 사람 없다는 것이다. 도록을 보자고 하여 겨우
찾으니 석포라는 호만 있고 이름은 기록하지 않아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내가 석포라는 사람이라고 해서 겨우 들어가서 관람을 한 일이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였는데 그 때 마침 가족과 함께 서울을
갔다가 전시회를 관람하려고 갔더니 입장료를 내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내 작품을 내가 보는데도 입장료를 내어야 되느냐?고 했더니 이름이 무엇이냐고
해서 오상인이라고 했더니 그런 사람 없다는 것이다. 도록을 보자고 하여 겨우
찾으니 석포라는 호만 있고 이름은 기록하지 않아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내가 석포라는 사람이라고 해서 겨우 들어가서 관람을 한 일이 있는 작품이다.
★.이백선생시 (산중문답)
★. 주자시 권학문
★. 고래다위허명로,불견아방정여소
★. 문여하의서벽산,소이부답심자한
★.동천년로항장곡매일생불매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