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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먹의 기록
우리나라 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물은 일본 쇼쇼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양가상묵(新羅楊家上墨), 신라무가상묵(新羅武家上墨) 2점으로 신라의 양가와 무가에서 좋은 먹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나라 도종의(陶宗儀)의 『철경록(輟耕錄)』 에 고구려에서 송연묵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 고구려 고분 벽화인 안악 3호분과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 보이는 묵서명(墨書銘), 그리고 담징이 제묵법을 일본에 전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좋은 먹이 생산되고 먹의 사용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먹으로는 청주 명암동 고려시대 목관묘에서 발굴된 단산오옥(丹山烏玉, 보물 제1880호) 명먹을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먹이다. 단산오옥은 ‘단양의 먹’이라는 뜻으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먹 품질이 가장 좋은데 단산오옥이라고 한다(墨 最良, 號爲丹山烏玉)”라고 기록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이 먹은 출토지와 제작 장소가 명확하고, 고려시대 먹 제작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려의 먹 관련 기록으로는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과 원나라 육우(陸友)가 지은 『묵사(墨史)』를 들 수 있는데, 고려의 송연 먹이 우수했음과 중국에서 명성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황금기를 이룬 조선의 먹
조선시대는 먹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는데, 특히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만든 유연먹은 중국, 일본의 먹에 비해 그 질이 월등히 우수하여 나라에 진상하고, 그 두 나라에 수출하였으며, 평안도의 양덕(楊德)에서 만든 송연먹은 향기가 좋기로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우수한 먹으로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찬란한 수묵화 및 서예 예술을 꽃피웠을 뿐 아니라 세계 인쇄 문화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금속 활자와 목판 인쇄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먹의 제조법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 조선시대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서명응(徐命膺)의 『고사신서(攷事新書)』,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와 중국 명나라 송응성(宋應星)의 『천공개물(天工開物)』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홍만선의 『산림경제』 卷四 雜方에는 원나라 문헌인 『거가필용(居家必用)』, 어숙권이 편찬한 『고사촬요(攷事撮要)』, 양우(楊瑀)가 짓고 원나라 왕여무(汪汝懋)가 증보하여 편집한 『산거사요(山居四要)』 등을 인용하여 먹 제조법(造墨法)과 먹을 저장하는 방법(藏墨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먹 제조기술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위의 문헌에서처럼 먹은 그을음과 아교로 만들어진다. 그을음의 주성분은 탄소로서 그을음 속에 함유된 미량의 성분들이 주변 여건 등에 의해 변화하지만, 탄소는 완전한 물질로서 변화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아교는 동물성 단백질로 콜라겐이란 단백질을 분해·정제하여 얻어진다. 그 분자량은 수만 개에서 수십만개에 이르는 천연 고분자 물질이기 때문에 온도, 습도 등 주변 여건 등에 영향을 받아 저분자가 되면서 오랜 기간 동안 변화되는 성질이 있다. 따라서 먹을 만들 때 아교가 많은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먹이 만들어질 때는 36~40% 또는 50% 정도의 수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수분이 건조되면서 서서히 배출되어 완제품이 되었을 때는 16~18%의 수분이 남게 되는 것이다. 건조된 먹은 수분의 증발로 먹의 내부에 미세한 공기구멍이 형성된다. 이것이 습기가 많은 날에는 수분을 방출하고, 습기가 적은 날에는 수분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먹 속의 아교 물질에도 변화를 주게 되는 것이다. 처음 만든 먹과 1~2년 후의 먹색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먹의 조건
좋은 먹은 손으로 들었을 때 느끼는 촉감과 무게, 눈에 보이는 형태, 냄새에 의한 향료, 두드렸을 때의 소리로 판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벼루에 갈 때 부드러우면서도 미끄러지듯이 쉽게 잘 갈려서 사용에 편리하고 마음 가는 대로 붓을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 농담(濃淡)이 좋으면 으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먹의 물리적 특성을 들면 먼저 색깔이 검고 오래될수록 빛깔이 퇴색하지 않아 더욱 깊은 맛이 난다는 점, 그리고 부식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서화가 잘 부패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아교 성분으로 붓의 움직임을 민첩하고 원활하게 해주고, 수분의 조절에 의해 농담과 번짐의 조형성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부착력이 강하기 때문에 종이 깊숙이 침투한다는 점에서 동양화에 사용되는 흡수력이 좋은 한지에 적합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로 우리 먹의 재현을 위한 고유 먹의 서지학적 분석, 성분 분석, 조묵법 분석, 재료의 특성 분석 등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곧 고유 먹에 대한 복원은 물론이고 나아가 현대 첨단 과학기술과 접목함으로써, 송연먹의 탄소 성분과 음이온 및 향료를 활용한 소화·해독·지혈·테라피 효과를 갖는 약재 개발, 도자기와의 접목에 의한 고신선도 기능 함유 기능성 신소재 개발로 연결되어 고유 먹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