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불교문화재

大道無門

吳鵲橋 2016. 1. 2. 07:08

"大道無門"이란 불교의 무문관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무문관의 서문에
큰길에는 문이 없다. 그렇지만 길은 또한 어디에나 있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가면 온 천하를 당당히 걸어 나갈 것이다.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퍼옴)
화두가 무문관이요 조사관이다
문은 이분법적 규정에서 나와
집이나 방으로 들어서려면 문을 통과해야 한다. 사찰 법당에 들어서려면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이 쭉 들어서 있다. 부처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 열반과 행복의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문이 법문(法門)이다. 그런데 정말 정해진 어떤 문을 통과해야만 그 세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선(禪)에서는 진리로 통하는 입구에는 문이 없다고 한다. 법문(法門)은 무문(無門)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물은즉 무문 혜개(無門慧開) 선사는 “문을 통해 들고 나는 것은 잡스러운 것들이요, 인연을 통해 얻은 것은 마침내 부서지고 말 것이다.”라는 옛사람의 말을 든다. 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뭐 문을 통해 찾고 들어설 일이 이겠느냐는 말이다. 문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인데 그것으로 통해 얻은 것은 금방 허물어지고 말 것이며, 세속적인 지식과 무어 다를 게 있는가 하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진리를 보고 깨치려면 어떠한 문이든 그 문을 통해서 들어서지 말라는 말인가? 그런데 사실 문이란 우리가 편리를 위해 임의로 만들어 놓은 것이긴 하다. 사람들은 안은 성(聖)이고 우리 것이며 밖은 속(俗)이며 남의 것으로 규정짓고 담장을 치긴 한다. 그렇게 나와 너를 가른 상태에서 벽을 만들어 놓고 그 안으로 들어오려면 문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문을 통과하려면 허락된 사람만이다. 그리고 그 벽과 문이 너무 두텁고 좁기만 하다.
그런데 선에서 보면 벽도 없고 문도 없다. 성과 속이 따로 없다. 모두가, 삼라만상이, 두두물물이 본래 구족해 있고 성불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큰 벽을 쌓고 굳건하게 문을 걸어 잠근다. 그 문 안에 갇혀 속 좁은 삶을 살며, 오로지 나와 내편, 혹은 허락받은 사람만 통과시킨다. 그렇게 자신의 에고(ego)에 갇혀 경계를 만들며 살아가기에 답답하고 적이 많다.
그래서 이제는 문을 열어야 한다. 본래 문이 없던 그 문을 열어야 한다.
무문이라는 문의 빗장을 제치고 나가야
그 문을 열려면 무문이라는 문의 빗장을 제쳐야 한다. 이게 웬 역설이란 말인가? 무문이라면 문이 없는 것인데, 거기에 왜 빗장이 있는가. 혹시 무문도 빗장이 채워져 있기 때문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열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 무문이지만 거기에 빗장이 채워져 있다. 그래서 무문이라는 문의 빗장을 제치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무문관(無門關)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문은 어떻게 연단 말인가?
무문은 사실 열린 문이긴 하지만 분별적 사유에는 닫힌 문이다. 생각으로는 안간힘을 써도 열 수 없는 꽉 닫힌 문이다. 바람도 새 나갈 수 없다. 조그만 구멍마저 낼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그 무문, 문 없는 문, 무문의 빗장이 화두이기 때문이다. 화두가 무엇인가? 화두는 모든 생각의 출로를 차단한다. 생각의 길로는 도저히 그 화두라는 문을 열 수가 없다. 이리 가도 막히고 저리 가도 막힌다. 뒤로 돌아서 수도 없고 옆으로 비껴 갈 수도 없다. 그렇게 꽉 닫혀 있어 퇴로가 차단되어 있다. 그렇게 철벽처럼 빗장이 채워져 꽉 닫힌 문이다. 그런데 그 문을 열어야 한다. 그 문 없는 문의 빗장을 풀어야 한다.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깨치지 못하고 현실에 깨어 있지 못하며 그저 풀끝에 매달려 사는 한갓 허깨비 인생이나 미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서로 속 썩이고 오해하고 원망과 아쉬움이 가득한 채 속절없이 죽어간다.
이미 갖추어져 있거늘
그러나 그 문을 박차고 나가면 천하를 홀로 당당히 걷는 깨친 이가 된다. 그래서 『무문관(無門關)』에서 무문 혜개(無門慧開)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큰길에는 문이 없다. 그렇지만 길은 또한 어디에나 있다.
이 관문을 뚫고 나가면 온 천하를 당당히 걸어 나갈 것이다.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무문관』, 「서문」)
큰길이란 깨달음이다. 거기에는 사실 문이 없다. 깨달음에 어찌 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갖추어져 있는데, 왜 공연히 담장을 치고 문을 만들어 다는가? 어디든 길이 아니겠는가? 길은 이미 여러 군데 나 있다. 아니 사방팔방으로 뻥 뚫려 있다. 그런데 관념의 벽, 생각의 벽, 에고의 벽, 편견의 벽에 갇혀 있을 따름이다. 그 아상(我相)의 벽, 생각의 벽을 허무는 게 무문관이요, 화두다. 그 화두를 뚫고 나가면 그대로 열린 세상이다. 그래서 온 천하를 당당히 걸어가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을 선에서는 조사(祖師)라고 한다. 조사가 되려면 이 화두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된다. 그래서 화두를 조사관이라고 한다. 화두가 무문관이요 조사관이다. 그리고 무문관은 ‘쾅’하고 열리기 전까지는 꽁꽁 닫혀 있는 문이라고 해서 폐관(閉關)이라고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무문관 수행 가풍이 있다. 3개월, 혹은 6개월, 혹은 1년, 6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화두를 들고 수행한다. 단지 공양시간에만 조그만 문을 통해서 공양물을 제공할 뿐이다. 화두를 타파하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는 게 사실 무문관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우리가 에고의 벽, 분별의 벽에 갇혀 있으면 출가한 스님들마저 그렇게 힘들게 고행하는 것일까? 사실 문은 없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분별의 문을 만들어 무분별의 빗장으로 그것을 열려고 하는가? 정말 짐짓 맨살을 끓어 부스럼 만들고 상처만 낸 꼴이 아닌가? 그리고
다시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애쓰지 않는가?
참 알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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