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7일 불교문화연구원의 마지막 답사지가 법흥사였다.
5대적멸보궁의 한 곳이라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지않아 이번 답사의 중점을 법흥사에 두었다. 일주문에서 본절 까지 거리가 있어서인지 일주문은 그냥 지나쳤다. 차창밖으로 그냥 스쳐가면서 보니 주춧돌이 거북과 코끼리임을 알 수 있었다.
★. 법흥사의 창설 유래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서 서기 643년 신라시대(신라 선덕여왕 12년)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당시 자장율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코자 중국으로 유학, 중국 종남산 운제사(雲際寺)에 모셔져 있는 문수보살님의 석상 앞에서 7일간 정진기도 끝에 마침내 문수보살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 발우 등을 전수 받아 이곳 해동국 사자산에 이르러 법흥사를 창건하고 이어 적멸보궁을 세우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후 사자산 법흥사는 서기 847년에 신라말의 선승인 도윤칠감국사가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하여 이곳 사자산 법흥사에 선문을 개창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방대했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이어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 선사에 이르러서 사자산문은 더욱 번창하여 전국의 선승들이 이곳 사자산 법흥사를 찾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도윤칠감국사와 징효절중선사는 당시 국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채 이곳 사자산문을 나가지 않음으로써, 전 불교계와 조정의 존경을 받은 고승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웅장했던 사자산 법흥사도 역사의 흐름, 세태의 부침에 따라 중창을 거듭하게 되었다. 서기 643년 신라시대 때 창건된 이래, 서기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그 후에도 1730년 조선 영조 6년(3創建), 1778년 조선 정조2년(4創建), 1845년 조선 헌종 11년(5創建), 1939년 임시정부 당시(6創建), 그리고 이번까지 무려 일곱 차례 중창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특히 여섯 번째 창건 때 씌어진 탄허대종사 친필 상량문이 적멸보궁 해체 때 나옴으로써 이곳 사자산 법흥사가 얼마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성지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 일주문
주천을 따라 사자산에 이르면 법흥사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이 일주문이다 .
이곳의 일주문은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 일주문은 법흥사의 창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주지스님의 선몽과 사자산의 정기를 모아 건립되었다.
법흥사의 일주문 기둥에는 코끼리와 거북이 형상이 조성되어 있다 . 중생의 깨달음은 모든게 다 보이는데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꿈을 통해 사자산문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조성된 것이다.
일주문 ( 이 사진은 법흥사 홈페이지에서 퍼옴)
5대적멸보궁의 한 곳이라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되지않아 이번 답사의 중점을 법흥사에 두었다. 일주문에서 본절 까지 거리가 있어서인지 일주문은 그냥 지나쳤다. 차창밖으로 그냥 스쳐가면서 보니 주춧돌이 거북과 코끼리임을 알 수 있었다.
★. 법흥사의 창설 유래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서 서기 643년 신라시대(신라 선덕여왕 12년) 때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당시 자장율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코자 중국으로 유학, 중국 종남산 운제사(雲際寺)에 모셔져 있는 문수보살님의 석상 앞에서 7일간 정진기도 끝에 마침내 문수보살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와 가사, 발우 등을 전수 받아 이곳 해동국 사자산에 이르러 법흥사를 창건하고 이어 적멸보궁을 세우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후 사자산 법흥사는 서기 847년에 신라말의 선승인 도윤칠감국사가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하여 이곳 사자산 법흥사에 선문을 개창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방대했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이어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 선사에 이르러서 사자산문은 더욱 번창하여 전국의 선승들이 이곳 사자산 법흥사를 찾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도윤칠감국사와 징효절중선사는 당시 국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채 이곳 사자산문을 나가지 않음으로써, 전 불교계와 조정의 존경을 받은 고승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웅장했던 사자산 법흥사도 역사의 흐름, 세태의 부침에 따라 중창을 거듭하게 되었다. 서기 643년 신라시대 때 창건된 이래, 서기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그 후에도 1730년 조선 영조 6년(3創建), 1778년 조선 정조2년(4創建), 1845년 조선 헌종 11년(5創建), 1939년 임시정부 당시(6創建), 그리고 이번까지 무려 일곱 차례 중창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그 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특히 여섯 번째 창건 때 씌어진 탄허대종사 친필 상량문이 적멸보궁 해체 때 나옴으로써 이곳 사자산 법흥사가 얼마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성지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 일주문
주천을 따라 사자산에 이르면 법흥사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이 일주문이다 .
이곳의 일주문은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 일주문은 법흥사의 창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주지스님의 선몽과 사자산의 정기를 모아 건립되었다.
법흥사의 일주문 기둥에는 코끼리와 거북이 형상이 조성되어 있다 . 중생의 깨달음은 모든게 다 보이는데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꿈을 통해 사자산문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조성된 것이다.
일주문 ( 이 사진은 법흥사 홈페이지에서 퍼옴)
원음루 (사물이 설치 된 곳)
원음루의 안 쪽 현판은 금강문으로 되어 있었다.
적멸보궁을 가는 길이 이렇게 굴속을 지나야 한다.
적멸보궁 안내판이 물고기 형상을 하고있다.
적멸보궁전각
적멸보궁의 내부
불상은 없어도 닫집은 잘 만들어져 있었다.
적멸보궁(사리가 있는 곳)
수각
산신각 가는 안내판도 물고기 모양이다.
삼성각이 있으면서 산신각이 따로 있었다.
간판을 달기 위한 대 같은 대 이런 것도 처음으로 본다.
숲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징효대사 부도
징효 대사 보인탑비 (보물 612호)
촛불 켜는 곳을 돌로 만들어 놓았다.
새로 건축하고 있는 탑의 조감도
지금까지 만들어진 탑
소각장의 지붕도 막새기와를 이용하였다.
삼성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