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거산 운문사 (2008년 5월 12일 )
우리집앞 버스 주차장까지 김남수씨가 차를 가지고 왔다. 어디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냐고 하기에 경산을 거쳐서 자인 남산, 동곡으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를 것 같아서 네비게이션에 입력을 하고 출발을 하였다. 운문사의 외각주차장에는 주차할 공간이 아주 많았다. 다른 많은 사람은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소나무숲의 맑은 공기를 마시기로 하였다. 걸어보니 일제강점기에 송유를 채취하기 위한 상체기가 많이 보였으나 소나무는 건강하게 자랐다. 1KM가 넘는 소나무숲을 걸으니 운치가 있었다. 한 참을 걸어가니 옛 상가터들이 보이고 장사군들이 즐비하게 전을 펴고 있었다. 오늘(초파일)만 장사를 허락 한 모양이다.
운문사를 여러번 가보았지만 해탈문(사리암 가는 쪽으로 올라가다가 오른쪽 담벽을 타고 가면 해탈문이 있다.)으로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다. 운문사의 가람 배치가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였지. 왜 그런지는 몰랐다. 이 번에 확실하게 알았다. 유홍준의 문화유적답사기를 읽으면서 금당이 왜 일반인의 출입금지구역안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았으나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아에 옆문(보통 일반인이 정문인 줄 알고 있는 )으로 들어 가는데 오늘 우리 일행은 그리로 들어가니 연등에다 복잡해서 뒤로 (뒤인 줄 알았다) 갔다. 뒤로 들어가도 일반인 출입금지라고 써져 있으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개울로 내려갔다. 내려가니 넓적한 돌들이 개울 가운데 여기저기 있었는데 참 좋은 돌들이 많고 시원하고 깨끗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돌 하나씩 찾이하고 앉으니 박선생님이 "빨래 했으면 좋겠다" 라고 하니 신선생은 "이런 깨끗한 곳에서 어떻게 빨래를 " 하였다. 그래서 다시 살펴보니 내 어릴 때 시골 냇가에 빨래하던 돌과 비슷하고 자연 그대로가 아니고 넓적한 돌들을 1미터 간격으로 평평한 곳을 위로 인위적으로 둔 것 같아서 빨래터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하늘쪽을 보니 강을 가로 질러 빨래줄이 매여 있었다. 빨래터가 틀림없었다. 빨래줄을 확인하고서야 모두가 빨래터임을 인정했다.
오늘 답사의 계획을 세우는데 사리암을 갔다와서 공양을 하느냐? 아니면 공양을 하고 사리암을 가느냐?라는 두 가지 의견중 공양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으니 10:50분이니 약 한 시간만 있으면 공양시간이니 공양을 하고 사리암을 가기로 하고 출입금지구역안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곳이니 오늘의 답사는 평소에 볼 수 없는 곳을 보아두기로 하였다. 그런데 스님 이외는 보이지 않으니 들어가도 되는지 몰라서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스님 두 분이 냇가까지 왔으나 우리가 거기 있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 같고 공양 준비하는 쪽으로 올려다보니 승복 안 입은 사람 4-5명이 보여서 가보자고 하니 그 분들도 공양준비하는 사람이니 일반인은 갈 수 없다는 것을 내가 가다가 왜 왔느냐고 하면 모르고 왔다고 하면 된다고 하면서 들어가 보았다. 들어가니 스님들은 오늘의 공양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학인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을 지나니 금당과 석등이 나왔다. 아 여기가 금당이구나 하는 찰라 스님 한 분이 닥아와서 "이리로 오시면 안 됩니다." 라고 하셨다 합장을 하고 잘 모르고 들어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이왕 들어 온 것 용기를 내어서 사진이나 찍어 두어야 되겠다 싶어서 스님께 사진 한 컷 찍어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쾌히 승낙을 하였다. 나는 카메라를 가져가지 못해서 신선생님께 석등과 금당이란 현판을 넣고 학인스님들의 일하는 모습 세 컷을 부탁하여서 찍으려고 하니 학인스님들이 사진을 못 찍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스님의 허락을 받았노라고 하니 별 말이 없어서 찍고 옆으로 보니 칠성각이 있었다. 그 때야 아하 여기까지가 옛날 절이고 이 뒤의 것은 새로 증축한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점심공양은 11시 40분쯤 시작이 된 모양이다. 우리도 줄에 끼어서 공양을 받으니 나물이 8가지 절편 세조각. 방울 토마도 셋, 수박 한 조각 국 이렇게 진수 성찬이었다. 받아 가지고 툇마루에서 좌정하려고 하다가 바람이 불어서 방으로 들어가니 방이 뜨뜻하고 장판이 맨질맨질하였다. 내가 지금까지 절밥을 공양하는 중에는 가장 맛있는 공양이었다.
점심식사후 화장실을 찾아가니 왼쪽으로 여자들이 들어가기에 오른쪽은 남자화장실이라 생각하고 들어가니 소변보는 곳이 보이지않아서 내가 잘 못 들어왔나싶어서 밖에나와 살펴보았으나 남자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그 때야 여기는 비구니 승가대학이라는 생각이 나서 여자화장실에서 소변을 보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가끔 여자들이 남자화장실에 오는 것은 보아도 남자가 여자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것은 여기가 처음 있는 일이다.
사리암을 올라가려니 평소에는 못 올라가게 단속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버스가 있으니 버스를 타고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산책도 하고 걸어가겠다고 해놓고는 옆으로 빠져서 강을 따라 계곡을 한 참 올라가서 물에 발을 담그어 한 참을 쉬다가 내려오면서 올라갈 때 보아두었던 출입금지라는 표지를 무시하고 들어갔다.
쫓겨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이면서 들어가니 일반인 두 명과 스님이 환담을 나누고 계시는데 합장을 하였더니 "큰 절에 들렸다가 오시느냐"고 하시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여기는 스님들이 공무하는 선원이라 평소에느 일반인 출입이 금지이나 차나 한 잔 하라"고 하신다. 얼마나 고맙던지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의자에 앉으려니" 문수보살에게 참배를 하고 오라"고 하셨다. 아하 경내 구경도 하라는 뜻이구나 싶어서 문수전에서 참배를 하고 나오니 감주와 떡 과일이 차려져 있었다. 감주의 쌀 색깔이 여승들의 살 색깔보다도 더 하얗다. 설탕을 전혀 넣지않는 천연 감미였다.
내려 오면서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이 번에는 학장이 기거하는 죽림헌을 가 보기로 하였다. 스님이 거기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도 운문사의 건너편 산 기슭을 따라 내려오니 건물이 보였다. 죽림헌이 틀림없었다. 아무도 없기에 죽림헌을 둘러보고 조금 위로 올라가니 목우정이라는 정자가 예쁘게 자리를 찾이하고 그 옆으로 연못이 네 개
마음 심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보고 극락교(운뭉사와 연결되는 다리)를 건너려니 문이 잠겨서 되돌아 올라가려니 길이 멀고 내려오는 길이 보여서 내려오니 정말 멋진 정원이 있고 정자가 있어서 정자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고 정원수를 감상하면서 조팝나무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싸리라고도 하는 그 나무가 조팝나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잣나무 밑에서는 다람쥐가 까먹다가 잊어버리고 남긴 잣을 주워서 깨어보니 알맹이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상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다람쥐란 놈이 먹을 수 있는 것을 남겨 두었겠나 하면서 거의 다 내려오려는데 스님 한 분이 길을 가로막고 여기는 일반인이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모르고 들어왔다고 하고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하면서 나왔다. 운문사의 출입금지구역을 거의 다 본 듯하다. 내년에도 운문사에 와서 비빕밥을 얻어먹어야지
0. 빨래터 (파란 선 위의 빨래줄을 보고 빨래터임을 알았다. )
( 사진은 신구슬님이 찍어서 보내주었다 )
0. 학인스님들의 공부방
문을 열어서 고정하는 거북이모양 비구니스님들에 어울리는 아주 예뻤다.
이런 것은 평소에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0. 이런 무늬도 있었다.
0. 금당과 석등
금당 앞에 석등이 있는 것을 보면 이 금당에 본존불상이 모셔져야 되는데 현재는
학인스님들의 설법당인 것 같다.
(금부처님 계신 법당이라 금당이란 이름이 생겼다. 금당이 절의 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한다.탑이 중심에서 밀려나고 금당이 주인공이 된다.
신영훈씨의 절로 가는 마음 1권 186쪽)
약간 뒤의 옆으로 칠성각이 있다. (아래 사진)
0. 이 건물이 칠성각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범종루이다.
0. 후박나무인데 잎이 엄청 크다 학인스님들이 잘 가꾸어서 그런 모양이다.
0. 학인스님들의 일과표 (청풍료안의 벽에 붙어 있었다. 이 방에서 밥을 먹었다.장판이
유리알 처럼 깨끗하였다.)
0. 사무분장표인 듯 역시 방안에 있었다.
0.청풍료의 외부 최근에 단청을 한 듯 아주 깨끗하였다. 공양을 하기 위하여 길게
줄을 서있다.
0. 삼장원 확실한 뜻은 모르지만 역시 공부하는 건물인 듯 하다. 내년에 가면 확실히
알아보아야겠다.
0. 이 현판이 아주 의미 심장하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아마 들어보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릴 때는
우리지방(경북안동일직평팔동)에서는 화장실을 이렇게 불렀다. 그런데 여기는 남자 화장실이 없다.
비구니학인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이라 그것도 모르고 한참을 남자 화장실을 찾아보았으나 없어서 어쩔수 없이 이곳에서 실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