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고려사』에 충렬왕 5년(1279) 8월에 객관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객사는 고려 후기에 와서야 있었던 것으로 알기 쉬우나, 고려 초기부터 있었음이 확실하다. 외국사신이 내왕할 때 이곳에서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객사에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전(殿)’자를 새김)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망궐배(向望闕拜 :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하는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특히, 명나라와 통하는 연변에는 우리 사신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 보수 등 어려움이 많아서 인근 고을의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이 때때로 있어 폐단 또한 적지 않았다.
건물의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 외문(外門), 옆면에 무랑(廡廊) 등이 부속되었다.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로 하였다.
현존하는 객사 건물로 조선 전기의 것으로는 강릉의 객사문(客舍門, 국보 제51호)·전주 객사(보물 제583호), 안변 객사의 가학루(駕鶴樓, 1493), 고령 객사의 가야관(伽倻館, 1493), 경주 객사의 동경관(東京館) 좌우 익실(16세기말) 등이 있다.
후기의 것으로는 성천 객사 동명관(東明館)의 강선루(降仙樓), 통영 객사, 여수 객사 등이 남아 있는데,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객사는 각기 명칭이 있는데 평안도의 예를 들면 중화(中和) 객사는 생양관(生陽館), 순안(順安) 객사는 안정관(安定館), 숙천(肅川) 객사는 숙녕관(肅寧館), 안주(安州) 객사는 안흥관(安興館), 가산(嘉山) 객사는 가평관(嘉平館)이다.
이들 객사는 아전들이 맡아 관리했는데, 고려 때의 예를 보면 지방에 두었던 잡직(雜職)의 하나로, 객사사(客舍史)라 불리는 아전이 담당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각 고을의 아전수를 정할 때 1천정(丁) 이상의 군에는 객사사 4인, 500정 이상의 군에는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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