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무조(武曌). 무후, 무측천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고종(高宗:649~683)의 비(妃)로 들어와 황후(皇后)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40년 이상 중국을 실제적으로 통치했다. 생애 마지막 15년(690~705) 동안은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변경하고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썼다. 무후는 당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 제국을 통일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의 후궁으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649년 태종이 죽을 무렵 이미 태자(후의 고종)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죽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어 불사(佛寺)에 은거하고 있던 중 신임황제인 고종이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고종은 마침내 무후를 궁중으로 데려와 소의(昭儀)라는 비의 지위를 주었다. 무후는 먼저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후를 폐위시키고 655년에는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무후와 고종 사이에 4남 1녀가 태어났다. 무후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이들은 무후가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던 대신들이었다. 그들이 반대한 주된 이유는 무후가 고관(高官)의 딸이기는 하지만 귀족가문의 태생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들은 또한 무후가 선제(先帝)인 태종의 후궁이었다는 점을 들어 무후와 고종의 관계는 근친상간이 되므로 그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60년이 되어 무후는 반대파를 파직·추방·처형시킴으로써 모두 제거했다. 황족인 고종의 숙부마저 주살했고 그의 일가도 모두 유배당하거나 몰락했다.
무후는 638년 13세에 당 태종(太宗)의 후궁으로 궁중에 입궐했다. 이때는 당조가 태종의 노력으로 중국을 막 재통일한 시기였다. 태종의 후궁으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649년 태종이 죽을 무렵 이미 태자(후의 고종)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태종이 죽자 관습대로 비구니가 되어 불사(佛寺)에 은거하고 있던 중 신임황제인 고종이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고종은 마침내 무후를 궁중으로 데려와 소의(昭儀)라는 비의 지위를 주었다. 무후는 먼저 궁중 내의 비빈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후를 폐위시키고 655년에는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무후와 고종 사이에 4남 1녀가 태어났다. 무후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하여,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중신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이들은 무후가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던 대신들이었다. 그들이 반대한 주된 이유는 무후가 고관(高官)의 딸이기는 하지만 귀족가문의 태생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들은 또한 무후가 선제(先帝)인 태종의 후궁이었다는 점을 들어 무후와 고종의 관계는 근친상간이 되므로 그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60년이 되어 무후는 반대파를 파직·추방·처형시킴으로써 모두 제거했다. 황족인 고종의 숙부마저 주살했고 그의 일가도 모두 유배당하거나 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