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교문화재

채미정

吳鵲橋 2016. 3. 20. 05:25



채미정


2015년 4월 28일
안사 11회 전국동기회의를 마치고 채미정을 보았다.
정자 이름은 길재가 고려가 망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한 것을 중국의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경상북도 기념물 제55호. 고려 말 학자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창건되었다.
계류에 걸린 석교를 건너 흥기문을 지나면 우측에 채미정이 있고 좌측에는 구인재(救仁齋)가 있다. 후방에는 길재의 충절에 감격하여 읊은 숙종의 어필 오언구(五言句)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과 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채미정은 중앙 1칸은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 둘레에 모두 우물마루을 깔아 대청으로 꾸몄다. 온돌방의 사면에는 각각 2분합 들문을 설치하였으며, 대청 사면이 벽체 없이 개방되어 있다. 잘 다듬은 장대석 기단 위에 원통형으로 치석한 화강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주상의 2익공은 쇠서[牛舌] 위에 연봉(蓮峰)을 조각하였고, 귀포는 귀한대와 함께 2제공 위에 용두를 두었으며, 주간에는 초각 화반(花盤)을 1개씩 배치하였다.
가구는 5량가로서 퇴량을 양봉이 받았고, 중앙 온돌방의 기둥이 고주인 관계로 퇴량 위에 접시대공을 놓아 외기틀을 받고 있다. 구인재는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양측면은 2통칸 온돌방으로 꾸며 전퇴를 둔 초익공의 백골집[白骨家 : 칠을 안 하고 목재면을 그대로 둔 집]이다.
주련을 보니 한 쪽 기둥에만 있고 한 쪽은 없기에 집에 와서 찾아보았더니
원래는 대련으로 오른 쪽에 百世淸風이 있었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지주(砥柱)’는 황하 중류의 하남삼문협(河南三門峽) 경내에 있는 높이 10여 미터의 산 모양의 바위이다. 황하의 물결은 삼문협 일대에서 가장 세차게 흐르는데, 여기에서 인문(人門), 신문(神門), 귀문(鬼門) 등의 세 갈래 급류가 형성되어 격랑을 일으키며 돌진한다. 삼문협의 아래에는 산 모양의 지주가 삼문협을 통과한 급류를 막고 서 있는데, 지주 아래로는 강폭이 넓어지고 물결도 평탄하게 흘러간다. 이렇게 격랑을 일으키는 급류를 막고 서 있는 지주에서 유래하여, ‘中流砥柱’는 역경에도 의연히 버티는 용기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구인재의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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