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에서)
공자
태어난 때 BC 551
태어난 곳 노(魯)나라
죽은 때 BC 479
죽은 곳 노나라.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노(魯)
직업 사상가
.
공자는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색인 : 자기).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색인 : 교육철학).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색인 : 교수).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색인 : 정치철학).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태어난 때 BC 551
태어난 곳 노(魯)나라
죽은 때 BC 479
죽은 곳 노나라.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노(魯)
직업 사상가
.
공자는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유교의 역사는 공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부처는 불교의 창시자이고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지만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을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 전수자로 여겼다. 공자는 제사·천제(天祭)·장례 등의 의식들이 수세기 동안 존속해온 이유를 알아내고자 하다가 옛 것에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과거로의 여행은 근원에 대한 탐구로 공자는 그 근원은 소속감과 일체감에 대한 인간의 절실한 필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문화의 축적된 힘을 믿었고, 전통적 방식이 활력을 잃었다고 해서 장래에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잠재력마저 없어졌다고는 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역사관은 너무나 투철해서 자기 자신을 주(周)나라 때 꽃피웠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존속되도록 전수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의 생애는 그가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중국인은 그의 생애가 '평범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공자 생애의 평범성과 현실성은 그의 인간성이 영감이나 계시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수양과 자기 운명을 장악하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색인 : 자기).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유교적 전통에 뿌리 깊은 것이다. 또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유교의 핵심사상이다.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지만 정확한 연대와 역사적 배경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자는 BC 551년(襄公 22) 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노나라는 주의 건국공신인 주공 단(旦)의 아들이 개국한 유서깊은 나라였다. 공자가 음력 8월 27일에 태어났다는 통설은 많은 역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나, 양력 9월 28일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공자탄신일로 널리 봉축되고 있다. 타이완에서는 이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하여 국정공휴일로 지키고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는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마을로, 주대 문화의 전통의례와 전통음악의 보존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자의 조상은 귀족계급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공자가 태어났을 때 그의 가문은 영락한 평민에 지나지 않았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에는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0대에 벌써 지칠 줄 모르는 향학열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상했다.
공자는 창고를 관장하는 위리(委吏), 나라의 가축을 기르는 승전리(乘田吏) 등의 말단관리로 근무하다가 19세에 가정환경이 비슷한 여인과 결혼했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자는 특히 의례와 음악을 가르쳐줄 훌륭한 스승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공자는 6예(六藝)―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마차술)·서(書:서예)·수(數:수학)─에 능통하고 고전(古典), 특히 역사와 시(詩)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훌륭한 스승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색인 : 교육철학).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색인 : 교수).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정치라는 통로를 통해 인본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려고 애썼다(→ 색인 : 정치철학).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정치적 좌절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이 거의 12년에 이르는 천하철환(天下轍環)의 망명기간에 공자를 수행했다. 고결한 이상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공자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갔다. 국경을 관리하는 관원 하나는 "하늘은 선생님을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이오"라고 공자에게 말했다(〈논어〉 八佾篇 24장). 실제로 공자는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의의 신념에 불타 꾸준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실행하려고 하는 행동적인 양심으로 널리 알려졌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과 편집에 몰두하면서 고전의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열중했다. BC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기〉에 따르면 그의 제자 중 72명이 '6예'를 통달했고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의 수가 3,0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증자
태어난 때 BC 505
죽은 때 436경.
소속 국가 중국
직업 철학자
중국의 철학자.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 공자의 문하생이며 〈대학〉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대학〉은 〈예기〉의 한 부분이며 4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그는 여기에서 유가의 덕목인 충(忠)과 서(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효'를 재확립하는 데 힘썼는데, "부모를 기리고, 부모를 등한시하지 않으며, 부모를 부양한다"라고 하여 효를 3단계로 열거했다.
태어난 때 BC 505
죽은 때 436경.
소속 국가 중국
직업 철학자
중국의 철학자.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 공자의 문하생이며 〈대학〉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대학〉은 〈예기〉의 한 부분이며 4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그는 여기에서 유가의 덕목인 충(忠)과 서(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효'를 재확립하는 데 힘썼는데, "부모를 기리고, 부모를 등한시하지 않으며, 부모를 부양한다"라고 하여 효를 3단계로 열거했다.
자사
태어난 때 BC 483
죽은 때 402
소속 국가 중국
직업 철학자
중국의 철학자.
공급(孔伋)이라고도 한다. 공자의 손자로 노(魯 :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었음)나라 사람이다. 〈중용 中庸〉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은 현재 〈예기 禮記〉의 일부이며 4서(四書)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자의 '중'(中)에 관한 해석을 모범적인 인간의 중용적(中庸的)인 상태로써 재확인하고 있다. 또한 상대적이며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시중(時中)의 논의를 통해 중의 개념을 넓히고 있다.
태어난 때 BC 483
죽은 때 402
소속 국가 중국
직업 철학자
중국의 철학자.
공급(孔伋)이라고도 한다. 공자의 손자로 노(魯 :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에 있었음)나라 사람이다. 〈중용 中庸〉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은 현재 〈예기 禮記〉의 일부이며 4서(四書)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자의 '중'(中)에 관한 해석을 모범적인 인간의 중용적(中庸的)인 상태로써 재확인하고 있다. 또한 상대적이며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시중(時中)의 논의를 통해 중의 개념을 넓히고 있다.
맹자
태어난 때 BC 371경
태어난 곳 중국의 고대 추(鄒)나라
죽은 때 BC 289경
죽은 곳 중국.
소속 국가 중국
직업 철학자
중국의 고대 철학자.
맹자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 〈맹자 孟子〉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성선설은 현대에 와서도 유교학자들 사이에서 열띠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태어난 때 BC 371경
태어난 곳 중국의 고대 추(鄒)나라
죽은 때 BC 289경
죽은 곳 중국.
소속 국가 중국
직업 철학자
중국의 고대 철학자.
맹자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 〈맹자 孟子〉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성선설은 현대에 와서도 유교학자들 사이에서 열띠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이다.
초기생애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BC 1111경~255)나라는 사회적·정치적 위계질서가 분명한 봉건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특권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야심과 음모로 인해 지위의 찬탈과 형벌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봉건제도는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 엄청난 정치적·도덕적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공자에게 큰 근심을 주었던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고, 그결과 맹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BC 481~221)라고 불리는 난세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개인적 덕행과 선정(善政)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은 소귀에 경읽기와 같은 형국이었다. 비록 자신의 원칙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맹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 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BC 1111경~255)나라는 사회적·정치적 위계질서가 분명한 봉건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였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하게 규정된 특권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야심과 음모로 인해 지위의 찬탈과 형벌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봉건제도는 뿌리째 뒤흔들리게 되어 엄청난 정치적·도덕적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공자에게 큰 근심을 주었던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고, 그결과 맹자가 태어나 활약했던 시대에는 중국 역사상 전국시대(BC 481~221)라고 불리는 난세가 도래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개인적 덕행과 선정(善政)을 강조한 맹자의 가르침은 소귀에 경읽기와 같은 형국이었다. 비록 자신의 원칙이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맹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을 펴나갔다.
백성을 위한 철학자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2가지 측면에서 백성의 복지를 보살펴야 된다고 한다. 즉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도덕적·교육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구체적 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이 이야기가 〈맹자〉에서 3번이나 나온다. 또한 조세경감, 자유무역, 천연자원의 보존, 노약자를 위한 복지대책 수립,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 등을 주장했다. "생계수단이 든든할 때라야 든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恒有産 恒有心)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맹자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따라 인정을 펴야 한다고 꾸준히 제후들에게 권유하는 한편, 천명(天命)을 얻음과 함께 통치자는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과감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이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은 그 다음이다. 통치자는 가장 마지막에나 놓이는 구성요소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 書經〉에 나오는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맹자는 이처럼 분명하게 백성의 복지를 주장했고 정부의 민주적 통치원칙인 인정을 지지했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그의 고결한 통치철학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제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맹자의 좌절감은 깊어갔고 마침내 고국인 추나라로 돌아와 여생을 후학 양성에 바쳤다. 〈맹자〉는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각장 상하 2편, 총 7장 1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선설맹자의 철학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을 확충해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仁)을 가르쳤고 맹자는 성선설을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맹자에게 자명한 진실은 사단(四端 : 4개의 마음씨, 즉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을 인간이 타고 났다는 점이다. 이 사단을 잘 발달시키면 4개의 최고의 덕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직관적 지식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덕성함양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수양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을 안다. 자신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堯舜)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언제나 주요사상가로 여겨져왔지만 특히 송대(960~1279)의 성리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000년 동안 맹자는 중국인들에 의해 유교의 공동창시자(공자와 함께)로 숭배되어왔으며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2가지 측면에서 백성의 복지를 보살펴야 된다고 한다. 즉 백성들의 생계를 보장하는 물질적인 상황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도덕적·교육적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해주는 구체적 계획에 대해 언급했고 이 이야기가 〈맹자〉에서 3번이나 나온다. 또한 조세경감, 자유무역, 천연자원의 보존, 노약자를 위한 복지대책 수립,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 등을 주장했다. "생계수단이 든든할 때라야 든든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恒有産 恒有心)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맹자는 패도를 버리고 왕도를 따라 인정을 펴야 한다고 꾸준히 제후들에게 권유하는 한편, 천명(天命)을 얻음과 함께 통치자는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과감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백성이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토지와 곡식의 신은 그 다음이다. 통치자는 가장 마지막에나 놓이는 구성요소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 書經〉에 나오는 "하늘은 백성이 보는 대로 보고, 백성이 듣는 대로 듣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맹자는 이처럼 분명하게 백성의 복지를 주장했고 정부의 민주적 통치원칙인 인정을 지지했다. 맹자는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그의 고결한 통치철학을 실천에 옮기려고 한 제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맹자의 좌절감은 깊어갔고 마침내 고국인 추나라로 돌아와 여생을 후학 양성에 바쳤다. 〈맹자〉는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해놓은 것을 집대성한 것으로 각장 상하 2편, 총 7장 1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선설맹자의 철학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을 확충해 재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으로 '인'(仁)을 가르쳤고 맹자는 성선설을 사상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맹자에게 자명한 진실은 사단(四端 : 4개의 마음씨, 즉 惻隱之心·羞惡之心·辭讓之心·是非之心)을 인간이 타고 났다는 점이다. 이 사단을 잘 발달시키면 4개의 최고의 덕인 인(仁)·의(義)·예(禮)·지(智)가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주창한 성선설은 수천 년 동안 중국 사상가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직관적 지식과 직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고 개인의 덕성함양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으로 수양한 사람은 자신의 성품을 안다. 자신의 성품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맹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고대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堯舜)과 같은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언제나 주요사상가로 여겨져왔지만 특히 송대(960~1279)의 성리학자들이 그의 사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1,000년 동안 맹자는 중국인들에 의해 유교의 공동창시자(공자와 함께)로 숭배되어왔으며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존경받아왔다.
안회
태어난 때 BC 514
태어난 곳 노(魯:지금의 산둥[山東] 지방)
죽은 때 BC 483.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춘추시대
직업 사상가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학자로 공자의 제자.
자는 자연(子淵). 안연(顔淵)이라고도 한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는 학자·정치가·웅변가로서 뛰어난 사람이 많았으나 안회는 덕의 실천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연구와 수덕(修德)에만 전념하여,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으며, 공자의 제자 가운데 겸허한 구도자(求道者)의 상징이 되었다. 32세에 요절하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도다"라고 탄식했다 한다. 저술이나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그의 자손은 공자·맹자의 자손과 함께 취푸[曲阜]에 모여살면서 명·청대에 안씨학(顔氏學)을 세워 나라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태어난 때 BC 514
태어난 곳 노(魯:지금의 산둥[山東] 지방)
죽은 때 BC 483.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춘추시대
직업 사상가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학자로 공자의 제자.
자는 자연(子淵). 안연(顔淵)이라고도 한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는 학자·정치가·웅변가로서 뛰어난 사람이 많았으나 안회는 덕의 실천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연구와 수덕(修德)에만 전념하여,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으며, 공자의 제자 가운데 겸허한 구도자(求道者)의 상징이 되었다. 32세에 요절하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도다"라고 탄식했다 한다. 저술이나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그의 자손은 공자·맹자의 자손과 함께 취푸[曲阜]에 모여살면서 명·청대에 안씨학(顔氏學)을 세워 나라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