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문화재

장승과 벅수

吳鵲橋 2019. 1. 30. 10:37

(퍼옴)


'장승'이야기

 '장승'과 '벅수'

            

                                          

사진; 1, '개화기'때,- '독일'의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이 仁川府 鳥洞面 別離峴(인천시 만수동 성현마을의 '장승배기')에서,- 1890년 남몰래 뽑아서 훔처간 ‘장승’長栍으로, 현재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공개된 큰'장승'이다. '도둑질'과 '왜곡'의 천재라고 하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우리의 옛‘장승’을 수십점이나 소유하고 있지만,- 공개는 하지 않고 ‘침묵’만 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일제강점기'때 문화文化의 열등의식을 가진 '조선총독부'가 '수호신'역할의 '벅수'法首를 <'미신'迷信의 문화>으로 업신여기고, '장승'으로 왜곡시켜서 강제로 교육한 내용 때문인 것으로 추정이 된다.

우리의 '조상'들은,- '장승'과 '벅수'를 세우고 난 이후에는, 완벽하게 썩어 넘어진 다음에야 다시 세우는 뿌리깊은 전통 때문에, 우리 땅에서는 지금까지 남겨진 참모습(實體)의 '장승'은 만나볼 수가 없다. 인천 만수동 '장승배기'의 옛'장승'은 2015년, '황 준구'(그래픽 디자이너)가 처음으로 '독일'의 '박물관도록'에서 찾아내었고,- 그 자료를 옮겨와 알려지게 되었다. <'장승'의 '가슴'에 쓰여있는 '명문'銘文과, 전체의 '모습'이 확실하게 밝혀진,- '조선시대' 본디의 '장승'을 찾아낸 것이다>. 온 국민이 ‘장승’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장승’이다. (네이버 블로그; 장승이란 무엇인가?. 검색 참고).

사진; 2. 1906년, 경상남도 '통영'統營의 '수호신'으로 만들어진 ‘土地大將軍’은,- 한 쌍이 아닌, 단 하나만으로 세워진 <단독 ‘벅수’>다. ‘조선시대'때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벅수’들은 '음'과 '양'(陰陽)을 따져 2개로 만들어 져, 한 쌍을 이루고 있었지만,- '남자'와 '여자'로는 나눔이 되지는 않았었다. 다만,- ‘일제강점기’때의 몇몇 씨알머리없는 '민속학자'들에 의하여,- <'수염'이 그려져 있거나 없는 표현만으로, '남자'와 '여자'로 분류 되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그릇되게 나눔이 되어 졌을 뿐이다>. 창피한 일이다.

'조선시대'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남겨진 ‘벅수’法首의 대부분은,- 그 무렵에 '중국'에서 발생하여 '조선'땅으로 번지기 시작한, '잡귀'雜鬼와 '천연두'(疫病)를 막아내기 위하여,- 험악하게 생긴 ‘중국’의 '왕'(皇帝)이나 '장수'將帥들을,- '조선땅'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임명'任命을 하여 표현 된 <'두창痘瘡벅수'>들 이였다. 우리 '조상'들의 모습은 절대로 아니다. 가슴에 쓰여있는 '명문'銘文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토종 ’벅수’라고 속칭俗稱하는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은 ‘개화기’(1876- )를 앞뒤로 하여 나타나기 시작 하였고,- ‘상고시대’의 역사책 ‘태백일사’太白逸史가 공개된 때와 같다. (2001, 황 준구 사진).

'장승'長栍과 '벅수'法首는,- 서로의 역할이 다르다. 이른바 우리의 '민속학자' 1세대들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며, 그들에 의하여 우리의 '민속학'이 정립되고 만들어 졌다. 그들이 쓴 '책'과 '논문'에는,- '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과, '마을'과 '절집'(寺刹) 그리고 '읍성'(城門)을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기능의 '벅수'들을, 서로 나눔을 하지 못하였고,- '일본놈'들의 뜻대로 모두 '장승'으로만 통일하여 기록 하였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장승'이라는 실제의 모습(實體)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장승'은 "역참제도"의 폐지(1895)로 우리 땅에서 자연 소멸消滅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1912년부터 준비하여 1933년에 확정을 시키고 발표한 <'朝鮮語 綴字法 統一案'>(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내용에는, '벅수'와 '서낭'과 '수살'등 우리 '민속현장'의 목소리들은 전부 <'미신'迷信의 문화>로 판단을 하였고,- 이미 40여년 전에 우리땅에서 '역참제도'가 폐지되어,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는 '장승'이라는 표현을.- 그들은 뒤늦게 '표준말'로 지정을 하였고, 왜곡하였다.

우리의 '조국'祖國이 그들에게서 해방되어 7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행정부'('교육부'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국립민속박물관')와 모든 '백과사전' 그리고, '초등학교'의 '교과서'와 '참고서'에는 '벅수'가 전부 '장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민속문화'를 담당하고 있는 지금의 '공무원'公務員들은 모두가 '친일파'親日派다. 그들은 '일제강점기'때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교과서'로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의 후손後孫들에게는,- 기필코 우리고유의 전통 '민속문화'와 관계된 '말'(言語)과 '글'들을, 확실하고 올바르게 고쳐서 제대로 알려야 한다.

‘장승’이란 것은,- ‘신라’의 21대 ‘소지왕’炤知王이, 서기 487년에 나라의 '땅'과 '큰길'(官路,國道)을 합리적이며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하여 <역참驛站제도>를 도입하였고,- '큰길'만을 전문으로 안내하는 기능의 '돈대'墩臺(郵驛)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때에는 '길'을 가는 '나그네'와 '벼슬아치'들에게,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안내하기 위하여,- '댱승'(쟝승)을 만들어 세웠다. '댱승'의 가슴에는 <'현재의 위치와, 이웃마을의 이름과 거리距離, 방향'>을 꼼꼼하게 표시하여, '큰길'의 5리 또는10리 마다 촘촘하게 나라(官)세우고,- 나라에서 관리를 하였던 ‘이정표’의 기능을 '후'(堠)라고 쓰고, ‘댱승’(長栍)으로 읽었다. (堠; 댱·승,후. 俗呼五里墩. '길'의 거리(里程)를 기록하여, 五里마다 흙으로 쌓은 ‘돈대’(푯말)를 ‘후’堠라 하였다. ‘최세진’崔世珍이 한자漢子를 가르치기 위하여, ‘훈민정음’(1443)으로 쓴 책,- ‘訓蒙字會’(1527)에 표현된 글자(字)이다). (栍; ‘중국’의 글자가 아닌,- ‘조선’에서 만들어진< ‘댱승,생’字>로 알려져 있다).

'장승'은 본디부터 한 쌍이 아닌 '단독'으로 세워 졌으며,- ‘유행병’(疫病)과 잡스러운 ’귀신’(雜鬼)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길의 신'(路神)역할의 의미도 부여하였다. '장승'의 얼굴은 무섭게 생긴 ‘미르’(龍) 혹은 '치우'蚩尤를 닮은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을 하였고,- 몸통(가슴)에는 '길'의 정보를 꼼꼼하게 기록하여, '큰길'의 가장자리에 세웠다. 그 ‘장승’이 세워진 곳을 우리 조상들은 ‘장승배기’(장승박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우리 땅에는 1200여곳의 '장승배기' 옛 터가 조사되어 남겨져 있다.

‘장승’에게 지내는 ‘제사’의식은 없었다. ‘장승’은 '큰길'만을 안내하는 단순기능의 ‘푯말’(이정표)이였기 때문이다. 1876년 '개화기'를 시작으로 하여, 1884년에는 ‘우편제도’(郵政局)가 도입되었고,- 1895년에는 ‘역참제도’가 기능을 다하고 폐지되어, 임무任務가 끝이난 ‘장승’은 자연 소멸하였고,- 우리 땅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뒤에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때에는,- '문화적'文化的으로 열등의식을 느끼고 있던 '조선총독부'의 간사奸邪한 '민속학자'들에 의하여,- 이미 소멸된 '장승'의 본질과 기능機能을 조작하여, '수호신'역할의 '벅수'에 억지로 포함시켜 졌고,- '벅수'를 <미신迷信의 문화>로 가치와 쓸모를 깎아내려, '장승'이라고 부르고 쓰도록 왜곡하고 변질시켜서 교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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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수’法首란 무엇인가?,- '벅수'의 어원語源은, '불교'의 근본을 기록한 "화엄경"華嚴經에서 찾을 수 있다. <'법수보살'>法首菩薩로 표현되어 '수행자'修行者로 그려져 있다. <佛法守護의伽藍神으로, '佛法'을 닦고 '佛法'을 지키는 菩薩>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마을'과 '절집'(寺刹) 그리고, '성문'(城門)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법수'는 '벅수'로 변음變音이 되어, '조선시대'때 우리의 '민속문화'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우리<"민속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1520년, 일십당 ‘이맥’李陌이 목숨을 걸고 쓴 '상고시대'의 역사책,- "태백일사"太白逸史의 '개국신화' 내용에 의하면,- (‘태백일사’는,- ‘중국’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 '책'이라 하여, 나라에서 <금지된 '책'>으로 지정하였고 깊숙하게 숨겨져 왔었다. ‘개화기’(1876- )때, ‘이맥’의 후손 해학 ‘이기’李沂에 의하여,- 350여년 만에 그의 제자들에게 공개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벅수’란 것은,- ‘선인’仙人 혹은 ‘신선’神仙을 뜻하며, ‘백아강’白牙岡에는 ‘선인왕검’仙人王儉이 살았고,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곧 ‘선인법수’仙人法首다,라고 기록하였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는 하늘아래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방향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天下大將軍’이라 하였고,- 지하의 다섯방향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을 ‘地下大將軍’이라 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벅수’法首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벅수’란?. <‘단군 할아버지’>를 뜻한다. (‘백아강’白牙岡’이란, ‘왕검성’王儉城으로 추측이 되며,- ‘몽골’의 ‘셀렝게’ Selenge강가에 남아있는, ‘고을리’(고구려)의 '옛성'城을 뜻한다. 그곳에는 '고을리 칸'(고구려의 왕)으로 불리워지는 '훈누 촐로'(石人像)도 존재하고 있다. ('올란바아타르' 대학의 '몽골학자',- '발단 도르지' 교수). (네이버 블로그; '돌하르방'의 조상?. / 몽골 '솔롱고스'의 수호신,- '고을리 칸'. 검색 참고).

‘조선시대’때 만들어진 ‘벅수’들의 표정은,- '장승'과는 다르게, '중국'에서 몰려오는 '잡귀'雜鬼와 '유행병'(疫病)으로 부터, '조선'땅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의 '왕'이나 '장수'들을, '조선땅'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임명任命을 하였고,- '周將軍' '唐將軍' 또는, '南正重''火正黎' '鎭西大將軍' '逐鬼大將軍' '天子封木' '媧柱成仙' '補護東脈'등으로, <'중국'의 신화神話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표현을 하거나,- ‘도깨비’와 ‘치우’蚩尤, 또는 '용'龍의 표정을 하고 있으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땅'에서 '길'을 따라 떼를지어 들어오는 무서운 '역병'과 '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하여,- '역병'과 '잡귀'들의 고향땅(中國)을 다스리고 있는, 무섭고 힘쎈 '왕'이나 ‘장수’의 모습을, '벅수'法首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거꾸로(逆) 이용한 것이다. '조선시대'때 만들어진 '벅수'들의 험악한 표정은, <"절대로,- 우리 '조상'의 모습이 아니다">. '벅수'의 가슴에 쓰여 있는 '명문'(이름표)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나눔을 하는 것은 더욱 가당찮은 일이다. '일제강점기'때,- 쪼졸한 '일본학자'들에 의하여, 왜곡이 되고 변질되어 폄하貶下된것이다.

‘조선시대’때 만들어진 ‘벅수’들은,- 본디부터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한 쌍으로 만들어 진 ‘벅수’는 없었다. ‘개화기’(1876- )때 부터 ‘음양오행설’의 잘못된 '해석'으로,- ‘벅수’를 무조건 '남자'와 '여자'로 분리하여 표현하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女將軍이 탄생되었다. 비록 ‘얼굴’의 모습은 ‘여자’로 표현 되었어도, '명문'많은 ‘女將軍’이 아닌 ‘大將軍’으로 표현 하였어야 옳았을 것이다. 심각한 '성'性차별 이다. 아니면,- '天下大將軍'은 '天下男將軍"이라고 하였어야 옳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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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참제도'의 폐지(1895)로,- 우리땅에서 흔적痕跡도 없이 사라진 '장승'에 ‘벅수’를 포함시켜, ‘장승’으로 쓰고 부르도록 교육을 시킨 '조선총독부' 놈들은,- 세월이 40여년이나 흐른 뒤에, 저희들 마음대로 '장승'을 "표준말"로 지정을 하였다. 그 이후부터,- 우리는 아직도 '수호신'역할의 ‘벅수’를 ‘장승’이라고 부르고 있다. 뚜렷한 '일제강점기'때의 '찌꺼기'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고려시대’때 절집(寺刹)에서 운영하였던, ‘사채놀이’(利子돈 놀이)의 일종인 ‘장생고’長生庫(長生錢,長生布)와 '절집'의 경계를 표시하는 ‘말뚝’역할의 ‘장생표주’長生標柱(國長生,皇長生)가 ‘장승’의 밑바탕(根本)이라는 ‘뚱딴지’같은 억지를 부렸다. 우리의 '민속학자'들은 이에 한마디 '반론'이나 '반박'도 하지를 못하였고 그대로 받아들여져,- 지금도 우리의 '문화재청'과 모든 ‘교과서’ 그리고 '백과사전'에는, '절집'(寺刹)의 ‘長生庫’와 ‘長生標柱’가 ‘장승’의 유래由來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야말로 한심하고 눈물나는 '이야기'다. '장승'과 '벅수'에는,-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교육이 잘못된 것이다. 지금, 우리의 '민속학자'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들은,- '큰길'을 안내하는 기능의 '장승'을 세워야 할 '장승배기' 옛 터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기능의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이라는 '벅수'를 세워 놓고,- '장승'이라고 우기며, 매년 정하여진 날에 '장승제사'를 정성을 들여 지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장승'에게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음사'淫祀(不淨한 鬼神에게 지내는 祭祀)다. 그 대표적인 곳이, 서울의 동작구 '상도동' <"장승배기, 장승제">와 충청도 '청양땅'의 <"칠갑산, 장승대제">다. 상식 밖의 짓들을 '나랏돈'으로,- 부끄러움 없이 호화스러운 '헛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지내는 '제사의식'은,- '장승제'가 아니라 '마을제사'(洞祭) 혹은, '벅수제'라고 하여야 옳은 표현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사'淫祀를, '문화체육관공부'와 '서울시청'이 앞장서서 증명하고,- '광고'까지 하여 주고 있다. 나라의 '꼴'은 한심하고, '조상'들 에게는 미안하기만 할 뿐이다. (네이버 블로그; 상도동 장승배기의 진실. / 칠갑산 장승공원에는 장승이 없다. 검색 참고).

자라나고 있는 우리의 '후손'들 에게는,- '왜곡'되고 '변질'된 부분을 확실하고 바르게 고쳐서 알려야 한다. ‘장승’長栍과 ‘벅수’法首는 서로의 역할이 다른 것이라고,--- ‘장승’은 1895년 '역참제도'가 폐지되어,- 우리땅에서 임무任務를 마치고 완벽하게 사라졌다. 지금의 우리땅에는,- '장승'이란것이 보존되거나 남겨진것이 없다. 맨 '벅수'들 뿐이다.

[출처] '장승'과 '벅수'|작성자 9339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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