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수산 축서사 (鷲棲寺)
봉화군 물야면 문수산에 있는 축서사는 신라 문무왕 13(66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문수산 아래 지림사란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어느 날 밤 문수산 쪽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서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아주 잘 조성된 불상 앞에서 한 동자가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실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훗날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다니던 의상대사가 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바로 '축서사'다. 문수산도 이 설화에서 명명된 듯하다. 3년 뒤 의상대사가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부석사를 세웠다. 그래서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 한다. 대웅전(지금의 보광전)상량문에 의하면 1875년 당시에 이 절은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고 세 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44명의 스님이 수도하던 대찰이었다고 한다.한말 의병을 토벌하던 일본군이 방화하여 대웅전 한 동만 남기고 전소되었다. 고 한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보광전 석조비로자나불과 조선시대 작품인 목조 광배가 보물 제 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창기 교수님이 작성한 해설서)
차를 타고 가시면서 다시 설명을 하시는데
축서사의 역사와 새로 만든 탑이 아주 예술적 가치가 있는 탑으로 볼만 하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일행중 한 분이 한 술 더 떠 탑을 만들 때 주지스님이 돈과 시간은 얼마든지 줄테니 작품만 잘 만들어라는 지시를 하였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엉터리로 만들어져 있던데... (인터넷에서 보았기에)
전통절이면 전통에 맞는 건조물을 만들어야지,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모양을 만들어놓고 현대적 감각에 의해 만든 멋진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 전통사찰에는 전통사찰에 걸맞는 건조물을 건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탑은 원각사 십층탑과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아래 3층까지의 한자 亞자형을 본 따 온 것 같았는데 신라의 탑에는 이런 형태가 없다. 신라절이면 신라에 맞는 것을 만들어야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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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물야면 문수산에 있는 축서사는 신라 문무왕 13(66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문수산 아래 지림사란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어느 날 밤 문수산 쪽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서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아주 잘 조성된 불상 앞에서 한 동자가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실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훗날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다니던 의상대사가 이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바로 '축서사'다. 문수산도 이 설화에서 명명된 듯하다. 3년 뒤 의상대사가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부석사를 세웠다. 그래서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 한다. 대웅전(지금의 보광전)상량문에 의하면 1875년 당시에 이 절은 여러 동의 건물이 있었고 세 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44명의 스님이 수도하던 대찰이었다고 한다.한말 의병을 토벌하던 일본군이 방화하여 대웅전 한 동만 남기고 전소되었다. 고 한다.
9세기 후반에 조성된 보광전 석조비로자나불과 조선시대 작품인 목조 광배가 보물 제 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창기 교수님이 작성한 해설서)
차를 타고 가시면서 다시 설명을 하시는데
축서사의 역사와 새로 만든 탑이 아주 예술적 가치가 있는 탑으로 볼만 하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일행중 한 분이 한 술 더 떠 탑을 만들 때 주지스님이 돈과 시간은 얼마든지 줄테니 작품만 잘 만들어라는 지시를 하였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엉터리로 만들어져 있던데... (인터넷에서 보았기에)
전통절이면 전통에 맞는 건조물을 만들어야지,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모양을 만들어놓고 현대적 감각에 의해 만든 멋진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 전통사찰에는 전통사찰에 걸맞는 건조물을 건조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탑은 원각사 십층탑과 경천사지 십층석탑의 아래 3층까지의 한자 亞자형을 본 따 온 것 같았는데 신라의 탑에는 이런 형태가 없다. 신라절이면 신라에 맞는 것을 만들어야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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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입구의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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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이 있는 곳으로 올라 가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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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양 옆에 2기의 석등이 있다. 눈에 거슬렸다.
가람배치상 1사 1등이며 석등의 위치도 본 위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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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의 범종(언듯 보기에는 신라 성덕대왕 신종을 본 뜬 것 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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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부가 성덕대왕 신종처럼 파장형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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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상도 만들어져 있엇다. 좀 둔탁한 듯 하기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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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의 유두 모양도 비슷했다.
★. 당좌(종치는 자리)도 제 자리에 잘 만들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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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의 티 용뉴의 포뢰(용모양)가 여의주를 들고 있는 요양이다.
(신라종읜 여의주를 들거나 입에 문 경우는 없음)
그러니 몸은 신라이고 머리는 고려가 된 이상한 모양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 내려오다 스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대답할 말이 없으니
현대감각에 맞게
만들었다고 한다. 현대감각에 맞아도 이치에 맞아야한다.
★. 내가 이미 밝힌 문제의 탑이다.
이 탑 주위에도 4기의 석등이 있다.
동행한 신구슬도 영 못 마땅한 듯 관람을 하면서 내내 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스님께 여주었더니 자기는 잘 모르지만 주지스님이 현대감각에 맞게 만들었다고
한다. 현대 절이면 현대감각에 맞게 만들어도 되겠지만 이 절은 부석사보다 먼저
창건한 신라절이 아닙니까? 했더니 답을 하지 않았다.
★. 탑의 1층 옥개석
★.보광전의 닫집(보개형 같기도 하고 운궁형 같기도 하다. 나는 보개형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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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전의 비로자나불은 석불이지만 광배는 나무로 되어있는 색다를 맛이 난다.
(신라의 석불에 조선에세 광배를 한 셈인데 원래의 광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면 광배가 없었는지 스님께 여주어 보았으나 알지 못한다는 답이었다.)
★. 보광전과 대웅전 사이에 있는 괘불걸이대 위치로 보아 원래의 자리라면 전각의
위치가 잘 봇 되어 있다. (괘불걸이대는 본전의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 문화재 자료 사적 158호 표지석
★. 바로 이 석등이 이 절을 대표할 만한 석등이다. 이 좋은 석등을 두고 왜 여러 기의
새로운 석등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간다.
★. 최근에 지은 대웅전의 불상과 닫집, 아주화려한 보궁형이다.
(전에는 보광전이 본전이었으나 지금은 대웅전이 본전이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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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 (쇠북, 역시 최근에 만든 작품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