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에. 도 교위에 올렸던 글이다.
서예전시회에서 느낀 것을 교실과 연관시켜 보았던 것 같다.
서예전시회에서 느낀 것을 교실과 연관시켜 보았던 것 같다.
어떤 서예 전시회 (2003-11-26 16:05:09, Hit : 702)
오상인
25여 년 전에 선배(도무열)한 분과 어느 서예전시회를 관람 갔다가
멀리서 보니 좀 이상해서 작품 앞에 가까이 가서 보니 연필로 본을 뜬 다음 먹을 본 안에 채운 것이다. 말하자면 테두리를 연필로 하고 그 안에 먹을 채운 것이다. 선배 한 분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어떤 어른(전시회를 주관한 원장선생님-불행하게도 이분은 교직계의 원로이다.교장으로 정년퇴임하신 분 우상홍)이 야단을 쳤다.
" 작품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한 작품을 오래 보면 안 된다 "
는 것이다
꾸중을 듣고 물러서면서 전시회를 할 때 초대 글을 읽어보면 질책을 해달라고 했는데 구경도 못 하게 하니 의아했다
그리고 25년 교직에 있으면서 각종 연구학교다 시범학교다 해서 가 보면 25여년 전에 본 서예작품이 떠오른다
.
환경정리라든가 연구보고서 시범보고서 등이 그 때 본 서예
작품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
내 자신이 오늘도 아이들의 작품 (이 서예작품과 같은 작품)을 평가하면서 특색을 살린,
창의성이 발휘된 작품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본다
.
무학대사의 말대로 돼지 눈에는 돼지로 보여서일까 ?
이 의문은 영원히 안 풀릴지도 모른다
.
★. 歐陽詢의 生涯와 書의 特徵 (2008년 7월 2일 입력)
구양순은 陳 隨 그리고 唐나라초엽에 걸친 서예가로 우세남(당초의 삼대명필가의 한 사람)보다는 한 살이 많은데 新舊라는 서적에는 그의 사적이 이렇게 적혀있다.
字는 信本 담주의 임상사람 그의 부친 구양흘은 진나라 광주자사이었으나 어떤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을 당했다. 순은 얼굴모습이 아주 흉측하게 못 생겼으나 두뇌만은 비상하게 총명하여 책을 볼 때면 언제나 네뎃 줄을 한눈에 내리 읽었다. 널리 학문을 닦아 수나라의 태상박사란 벼슬을 살았다. 詢은 당고조 이연과는 친구 사이였다. 고조가 즉위하자 급사중(황제의 측근관)이 된 詢은 배구 등과 함께 예문류취 일백권을 편집했다. 순은 처음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후에 서풍이 차츰차츰 변하여 필력이 힘차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편지 등을 입수하면 다투어 교본으로 사용했다. 고려에서도 그의 글씨를 소중히 알아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그의 필적을 구해 갈 정도였다. 詢이 하루는 길가에서 陳대의 명필 索靖의 쓴 碑를 보고 두서너 걸음 지나쳤다가 되돌아와서는 碑 곁에서 사흘간을 묵고서야 겨우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관연간 초에 태자솔경령(황태자담당관)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詢은 그 자인 信本 혹은 率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태종은 홍문관을 두고 학생들을 뽑아서 서법을 연구하게 했는데 詢은 우세남과 함께 으뜸가는 서도가로서 그 학사직을 겸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후에 발해남의 작위가 수여되고 전관 15년에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순은 隨代에 자라난 사람이다. 書學을 깊이 연구하여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의 황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더욱 정관초에는 蘭亭書마저 배웠다. 따라서 그 결체가 진법답게 건강하고 힘차고 또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南派의 특징이다. 그러나 구양순의 준엄하고 세찬 점 즉 붓을 댈 때 면도날로 베고 도끼날로 찍듯하는 그 명쾌한 날카로운 맛은 분명히 北派의 영향이다. 그가 쓴 방언겸의 비는 그가 북파의 서가임을 잘 보여준다. 그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범벅 한 것 같은 서체 칼을꺾듯한 落筆法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글씨를 쓰는데 온순하기는 쉽고 기발하기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구양순의 글씨는 기발하면서도 온화하게 보인다. 奇가 그 極에 이르러 正이 된 것이다.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그는 글씨의 結構를 깊이 연구하고 그러한 실천 속에서 비로서 자기의 것을 창조해 낸 것이다. 點과 畫의 俯仰向背 分合聚散이 힘의 균형에 맞고 빽빽한데 빈 곳 곧은데 휜 곳이 적절히 놓여져서 변화가 다채로워졌다.그의 글씨는 복잡하든 혹은 단순하든지간에 견실하고 차분하다. 마치 몸을 굽히고 빨리 달리는 모습이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며 또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구양순서의 결체의 멋진 묘미가 바로 이런 데 있다. 결국 그의 특징은 왕희지 부자의 기법에 북비의 꿋꿋함 그리고 漢隸 章草(예서를 간략하게 쓴 초서의 별체)등의 갖가지 요소를 섭취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낸 데 있다. 한 가지 일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 자국이 둥글둥글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그는 이렇듯 남북 쌍방의 좋은 점을 겸해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서법예술에 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 歐陽詢의 生涯와 書의 特徵
구양순은 陳 隨 그리고 唐나라초엽에 걸친 서예가로 우세남(당초의 삼대명필가의 한 사람)보다는 한 살이 많은데 新舊라는 서적에는 그의 사적이 이렇게 적혀있다.
字는 信本 담주의 임상사람 그의 부친 구양흘은 진나라 광주자사이었으나 어떤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을 당했다. 순은 얼굴모습이 아주 흉측하게 못 생겼으나 두뇌만은 비상하게 총명하여 책을 볼 때면 언제나 네뎃 줄을 한눈에 내리 읽었다. 널리 학문을 닦아 수나라의 태상박사란 벼슬을 살았다. 詢은 당고조 이연과는 친구 사이였다. 고조가 즉위하자 급사중(황제의 측근관)이 된 詢은 배구 등과 함께 예문류취 일백권을 편집했다. 순은 처음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후에 서풍이 차츰차츰 변하여 필력이 힘차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편지 등을 입수하면 다투어 교본으로 사용했다. 고려에서도 그의 글씨를 소중히 알아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그의 필적을 구해 갈 정도였다. 詢이 하루는 길가에서 陳대의 명필 索靖의 쓴 碑를 보고 두서너 걸음 지나쳤다가 되돌아와서는 碑 곁에서 사흘간을 묵고서야 겨우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관연간 초에 태자솔경령(황태자담당관)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詢은 그 자인 信本 혹은 率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태종은 홍문관을 두고 학생들을 뽑아서 서법을 연구하게 했는데 詢은 우세남과 함께 으뜸가는 서도가로서 그 학사직을 겸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후에 발해남의 작위가 수여되고 전관 15년에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순은 隨代에 자라난 사람이다. 書學을 깊이 연구하여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의 황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더욱 정관초에는 蘭亭書마저 배웠다. 따라서 그 결체가 진법답게 건강하고 힘차고 또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南派의 특징이다. 그러나 구양순의 준엄하고 세찬 점 즉 붓을 댈 때 면도날로 베고 도끼날로 찍듯하는 그 명쾌한 날카로운 맛은 분명히 北派의 영향이다. 그가 쓴 방언겸의 비는 그가 북파의 서가임을 잘 보여준다. 그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범벅 한 것 같은 서체 칼을꺾듯한 落筆法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글씨를 쓰는데 온순하기는 쉽고 기발하기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구양순의 글씨는 기발하면서도 온화하게 보인다. 奇가 그 極에 이르러 正이 된 것이다.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그는 글씨의 結構를 깊이 연구하고 그러한 실천 속에서 비로서 자기의 것을 창조해 낸 것이다. 點과 畫의 俯仰向背 分合聚散이 힘의 균형에 맞고 빽빽한데 빈 곳 곧은데 휜 곳이 적절히 놓여져서 변화가 다채로워졌다.그의 글씨는 복잡하든 혹은 단순하든지간에 견실하고 차분하다. 마치 몸을 굽히고 빨리 달리는 모습이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며 또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구양순서의 결체의 멋진 묘미가 바로 이런 데 있다. 결국 그의 특징은 왕희지 부자의 기법에 북비의 꿋꿋함 그리고 漢隸 章草(예서를 간략하게 쓴 초서의 별체)등의 갖가지 요소를 섭취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낸 데 있다. 한 가지 일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 자국이 둥글둥글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그는 이렇듯 남북 쌍방의 좋은 점을 겸해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서법예술에 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 ★. 歐陽詢의 生涯와 書의 特徵
구양순은 陳 隨 그리고 唐나라초엽에 걸친 서예가로 우세남(당초의 삼대명필가의 한 사람)보다는 한 살이 많은데 新舊라는 서적에는 그의 사적이 이렇게 적혀있다.
字는 信本 담주의 임상사람 그의 부친 구양흘은 진나라 광주자사이었으나 어떤 사건에 관련되어 사형을 당했다. 순은 얼굴모습이 아주 흉측하게 못 생겼으나 두뇌만은 비상하게 총명하여 책을 볼 때면 언제나 네뎃 줄을 한눈에 내리 읽었다. 널리 학문을 닦아 수나라의 태상박사란 벼슬을 살았다. 詢은 당고조 이연과는 친구 사이였다. 고조가 즉위하자 급사중(황제의 측근관)이 된 詢은 배구 등과 함께 예문류취 일백권을 편집했다. 순은 처음에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후에 서풍이 차츰차츰 변하여 필력이 힘차기로는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편지 등을 입수하면 다투어 교본으로 사용했다. 고려에서도 그의 글씨를 소중히 알아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그의 필적을 구해 갈 정도였다. 詢이 하루는 길가에서 陳대의 명필 索靖의 쓴 碑를 보고 두서너 걸음 지나쳤다가 되돌아와서는 碑 곁에서 사흘간을 묵고서야 겨우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관연간 초에 태자솔경령(황태자담당관)에 임명되었다. 그래서 詢은 그 자인 信本 혹은 率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당태종은 홍문관을 두고 학생들을 뽑아서 서법을 연구하게 했는데 詢은 우세남과 함께 으뜸가는 서도가로서 그 학사직을 겸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후에 발해남의 작위가 수여되고 전관 15년에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양순은 隨代에 자라난 사람이다. 書學을 깊이 연구하여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의 황정경을 공부한 적이 있다. 더욱 정관초에는 蘭亭書마저 배웠다. 따라서 그 결체가 진법답게 건강하고 힘차고 또 잘 정돈되어 있다. 그것은 南派의 특징이다. 그러나 구양순의 준엄하고 세찬 점 즉 붓을 댈 때 면도날로 베고 도끼날로 찍듯하는 그 명쾌한 날카로운 맛은 분명히 北派의 영향이다. 그가 쓴 방언겸의 비는 그가 북파의 서가임을 잘 보여준다. 그 해서와 예서의 필법을 범벅 한 것 같은 서체 칼을꺾듯한 落筆法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글씨를 쓰는데 온순하기는 쉽고 기발하기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러나 구양순의 글씨는 기발하면서도 온화하게 보인다. 奇가 그 極에 이르러 正이 된 것이다.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그는 글씨의 結構를 깊이 연구하고 그러한 실천 속에서 비로서 자기의 것을 창조해 낸 것이다. 點과 畫의 俯仰向背 分合聚散이 힘의 균형에 맞고 빽빽한데 빈 곳 곧은데 휜 곳이 적절히 놓여져서 변화가 다채로워졌다.그의 글씨는 복잡하든 혹은 단순하든지간에 견실하고 차분하다. 마치 몸을 굽히고 빨리 달리는 모습이 안정되고 아름답게 보이며 또 결코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구양순서의 결체의 멋진 묘미가 바로 이런 데 있다. 결국 그의 특징은 왕희지 부자의 기법에 북비의 꿋꿋함 그리고 漢隸 章草(예서를 간략하게 쓴 초서의 별체)등의 갖가지 요소를 섭취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낸 데 있다. 한 가지 일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쓴 글씨는 모나면서도 붓 자국이 둥글둥글하고 온화하면서도 힘차다. 그는 이렇듯 남북 쌍방의 좋은 점을 겸해 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서법예술에 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