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는 크게 '당해와 육조해'로 나누는데 구성궁예쳔명은 당해의 대표적 작품이다.
당나라초기 대표적 서예가인 구양순(557~641), 우세남(558~638), 저수량(596~658)
세 사람중 구양순(字는 信本)이 76세때 황제의 명을 받아 쓴 비문이다.
75세라고 되어 있는 책도 있었음
1. 九成宮醴泉名(구성궁예천명)
해서는 書法(서법)의 기본적인 結構(결구)와 用筆(용필)을 갖추고 있어서
해서는 書法(서법)의 기본적인 結構(결구)와 用筆(용필)을 갖추고 있어서
각 서체의 서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중에서도 구성궁예천명은 교본으로서 이상적이다.
字形(자형)이 크고 정규적이며 端嚴(단엄)하여 해서로서의 기본조건을
字形(자형)이 크고 정규적이며 端嚴(단엄)하여 해서로서의 기본조건을
모두다 충족시키고 있다. 또 이것은 구양순의 대표작이며
背勢(배세)구성의 대표적 작품이기도 하다.
구성궁이란 唐帝室(당제실)의 離宮(이궁) 이름으로서
구성궁이란 唐帝室(당제실)의 離宮(이궁) 이름으로서
挾西省(협서성)의 麟遊(린유), 즉 현재의 붕양 부산중에 있었다.
이 離宮(이궁)은 隋(수)의 文帝(문제)가 조영한 것으로 隋(수)가 가까워온 후에는
한동안 황폐되었던 것을 당 태종이 개축을 하고
舊名(구명)인 仁壽宮(인수궁)을 구성궁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나 지세가 높은 탓인지 물이 결핍된 흠이 있었다.
그러나 지세가 높은 탓인지 물이 결핍된 흠이 있었다.
언젠가 태종이 황후와 함께 궁내를 산책하는데,
우연히도 아지랭이 피는 곳이 있어 그곳을 파 보았더니 샘물이 솟아 나왔다.
그래서, 실로 당 제실의 덕에 따른 一大祥瑞(일대상서)라 하여
이 사실을 적어 碑에 刻(각)을 하게 된 것이다.
撰文(선문)은 (위징)에게 명하고 글씨는 구양순에게 명령하여 쓰게 한 것이
撰文(선문)은 (위징)에게 명하고 글씨는 구양순에게 명령하여 쓰게 한 것이
바로 九成宮醴泉名(구성궁예천명)이다.
★.구성궁예천명의 부분 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