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刻舟求劍

吳鵲橋 2016. 4. 17. 07:27



刻舟求劍


다시 읽어보아도 좋은 글이라 옮겨보았다.
刻舟求劍(각주구검)
[字解]
刻(새길 각)
舟(배 주)
求(구할 구)
劍(칼 검)
[意義]
어리석고 미련하여 융통성이 없다는 뜻이다.
옛것을 지키다 시세의 추이도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하나만을 고집하는 처사를 비유해서 한 말이다.
[出典]
여씨춘추(呂氏春秋).
[解義]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영토의 팽창(膨脹)과 전국(全國)의 패권(覇權)을 차지하는 것에 지상 목표를 삼고 있던 중국 고대(古代)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당시의 시대적 요청과 역사적 흐름으로 인한 왕성한 사상(思想)의 발전을 가져온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가(思想家)들은 자신의 주장으로 당시 위정자(爲政者)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강한 독설(毒舌)로 유세(遊說)를 하고 다녔다.
´각주구검(刻舟求劍)´ 고사 역시 자신의 사상(思想)을 부각시키기 위해 강한 어조(語調)로 주장하는 이야기이다. 맹목적인 주장이 아닌 논리적(論理的) 이론(理論)을 뒷받침하면서 상대를 설득(說得)하는 유세(遊說)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누구라도 설득 당하지 않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배[舟]에 새겨[刻] 칼[劍]을 구하다[求]˝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은 고사 이야기로 많이 알려져 있고, 의미 역시 ´시대의 변화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하는 고지식하고 용통성 없는 사람´의 뜻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는 각주구검(刻舟求劍) 고사의 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어떻게 그렇게 강한 어조의 독설(毒舌)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겠다.
초(楚)나라의 어떤 칼잡이가 장강(長江: 陽子江)을 건너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에 올라 뱃전에 앉았다. 그런데 배가 강 중간쯤에 도착했을 때, 배가 출렁거리는 차에 검객(劍客)이 차고 있던 칼이 그만 강 물에 빠지고 말았다.
놀란 검객은 급히 작은 단도(短刀)로 떨어뜨린 뱃전에 표시하면서,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이다.˝라고 했다.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하자 검객은 이제 칼을 찾아야겠다고 표시해 놓은 뱃전에서 물에 들어가 칼을 찾으려 했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야기만으로 보자면 우스운 한 편의 소품(小品)에 불과하지만, 刻舟求劍이 의도한 주장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면 고사의 올바른 이해가 될 것이다. 그 해답의 출발로 먼저 고사의 출전(出典)인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살펴본다.
《여씨춘추》라는 책의 출간에는 여러 가지 야화(野話)가 전해진다.
진(秦)나라의 재상(宰相)까지 오른 여불위(呂不韋: ? - B.C 235)라는 인물이 편찬한 책으로 전해지는데, 법가(法家) 사상을 중심으로 도가(道家), 유가(儒家), 농가(農家) 등 제자(諸子)의 학설(學說)과 설화(說話) 등을 모아 엮은 일종의 백과전서(百科全書)의 사상서(思想書)로 볼 수 있고, 그 사상 역시 제자백가 사상 중 잡가(雜家)로 분류된다.
여불위(呂不韋)는 본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거상(巨商)으로 많은 부(富)을 소유한 인물이었는데, 당시 조(趙)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秦)나라의 왕자 자초(子楚: 후에 장양왕이 됨, 진시황의 부친)를 도와 권력에 접근하였고,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하자 재상까지 올라 권력을 잡고 나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바로 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기에 이른다. 그는 당대의 학자(學者)나 논변가(論辯家)들 3천 여명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여씨춘추》를 저술하게 하고 완성된 책을 진나라의 도읍지 함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 두고 천냥을 걸고 사람들에게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냥을 주겠다˝고 할 정도로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된 고사가 또한 ´일자천금(一字千金)´인데, 일자천금(一字千金)의 의미는 현재에도 ´최고의 작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화려하게 출간된 《여씨춘추》의 확고한 주장에 그 힘을 더해준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고사가 바로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여씨춘추》의 각주구검 이야기 뒷 부분에 이런 말을 이어진다.
˝ 지나간 옛 법만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면 칼잡이와 마찬가지이다. 시대는 이미 지나가 변했지만 그 법은 그대로가 아닌가?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 以古法 爲其國 與此同. 時已徙矣 以法不徙 以此爲治 豈不難哉. ]
바로 확고하고 자신있게 역설(力說)한 《여씨춘추》의 강한 주장은 그 사상의 고하(高下) 여부를 떠나서 자신만만한 여불위(呂不韋)의 독설(毒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권력의 정상에까지 오른 여불위는 진시황(秦始皇)과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진위(眞僞)가 의심스러운 야화(野話)가 전해진다.
조(趙)나라의 볼모였던 진(秦)나라의 왕자 자초(子楚)를 도왔던 여불위는 그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상인으로 전국(全國)을 돌며 찾아낸 절세(絶世) 미인(美人)을 자초에게 진상(進上)하는데, 자초와의 슬하(膝下)에서 아들 정(政)을 낳게 되었고 그 아들이 후에 진시황(秦始皇)이 된다. 그런데, 일설(一說)에 여불위가 미녀를 진상하기 전에 임신(姙娠)을 시켰고 그 자식이 바로 정(政)이라는 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일로 진시황(秦始皇)이 왕이 되고 나서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모(生母)와 놀아나다가 결국 그로 인해 자결을 하고 마는 것을 볼 때,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生父)라는 설이 설득력(說得力)을 얻게 된다.
어쨌든 여불위라는 인물은 우리가 사람의 인생(人生)에 대해서 논할 때, 전형적인 인생유전(人生流轉)을 겪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인(商人)으로서 그가 이룬 경제적 부(富)와 그로 인한 권력의 접근과 권력 정상의 군림(君臨), 하지만 결국 ´권불십년(權不十年)´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권력의 끝은 파멸이 되고 만 것이다. 오히려 여불위의 종말(終末)을 보면서 그가 주장한 세태의 변화에 적극 대처하면서 임기응변(臨機應變)을 할 줄 아는 사람의 결말이 또한 어떠했는가를 돌아본다면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를 다른 관점(觀點)에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멸시(蔑視)와 조롱을 당하기 일쑤다. 오히려 눈치 빠르게 상황에 대처하면서 임기응변을 적절하게 구사(驅使)하는 사람이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칭송 받기까지 한다.
하지만 반드시 남 보다 앞서면서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만이 최고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어눌(語訥)한 듯 하면서 양보(讓步)와 배려(配慮)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 사회가 밝을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준말]
각주(刻舟),각선(脚線),각현(刻鉉)
[類似語]
수주대토(守株待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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