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서예세상에 열심히 들어가보았더니 자기글을 열심히 읽어준다고 책 한권을 보내왔다.
김영자씨의 '서예 인생사'였다.
이분은 도이석씨로부터 시작해서 왕철. 근원에 이르기까지 여러선생님에게 사사한 것이다.
맨 처음에 접한 분이 소앶 도이석씨이고
두번 째로 찾은 분이 왕철 이동규씨였다.
초전 권창륜씨 근원 김양동씨
"선생님의 체본 글씨와 닮으면 닮을수록 글자 쓰기의 숙련도가 향상된다고 믿었습니다."
해서중에서도 구성궁체가 법첩이 제일 까다로워서 서예를 배우는 사람꺼린다고 하였습니다.
국전을 장악하기 위한 계파 간의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
광복이후에는 손재형이 국전을 장악했고, 김응현 게열은 그 권력에 도전했습니다.
명분은 서예의 예술미와 서법론이 다툰 것이지만 사실은 국전 장악의 싸움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초정 권창륜 선생이 동방연서회의 회장이 되면서 국전도 장악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서예인은 학원으로 생계 수단을 삼았습니다. 대학에 서에과가 없던 시절이라
국전의 입.특선이 유일한 경력이었습니다.
1989년에 원광대학에서 서예과를 개설
1992년에 계명대학에서 서예과 개설
그러나 대학에서는 서예교육과정에 대한 준비가 없었고
서에교육을 담당할 교수진 확보도 어려웠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학과만 만들어 놓으니 사상누각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대학 서예과의 문제점은 졸업을 하여도 마땅한 진로가 없었다.
서예학원이 길이라면 길이었다.
서예학원을 운영하기 위하여서는 서예과 졸업보다 국전 추천작가가 더 요긴했습니다.
1990년대에 현대서예라는 말이 도입되었다.
서예의 기초를 다지는것과 국전에 잆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내 작품이 입선에 뽑을만큼 잘 쓴 작품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심사위원이 용케도 알아보고 뽑아주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검은 먹색 일색에서 알록달록한 색을 도입하자는 것이고 서법 중심으로 공부하는 데서 탈피하자는 것이 다.
또한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한 한자 중신의 서예를 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을 찾자는 것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이 현대서예이다.
서법에 맞추엇머 글을 쓰려면 만흔 시간이 소요되므로 실용성이 떨어진다.
시간을 단축하려는 목적으로 글씨 쓰는 법칙을 느슨하게 풀어주면서 전서에서 예서로 나갑니다.
글씨를 쓴다는 것은 법칙에 맞게 쓴다는 것이고 결구 기능의 범주안에 갇히게 됩니다.
기능이 강조되면 에술성을 평가하기가 애매합니다.
왕희지 왕헌지 부자가 서예사에서 이름을 남기는 이유가 서예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격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서도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광복이후 일본의 영향에서 벗아나야겠다는 의지의 발로인지 서법의 독창성을 강조하려는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서예라고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문자의 개념에서 예술의 개념으로 바꾼 것입니다.
예전에는 초대작가가 되었다면 대구의 서예계가 떠들석 하였는데
지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조용하다는 것이 달라진 풍속도입니다.
요즈음 서예하는 분들은 공모전에 입상을 하면 성취감 때문에 계속할 수 있다고 하여도
대부분의 사람은 무슨 성취감요...내가 즐거워서 하는 것이고 실어지면 그만두면 되지요...
회원전도 관심없다고 하는 시대이다.
최근에는 경력에 초대작가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1932년을 마지막으로 조선 미전에서 書部가 빠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서예를 예술이 아닌 정신 수양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서도라고 개념정리르 하였습니다.
광복이 되자 한국 서예계는 재빠르게 서도를 서예로 명칭을 바꾸고 국전의 한 장르로 편입시켰습니다.
중국은 명칭도 서법이라고 하여 문자로 다룬다.
대만도 서를 국어과에 포함시켜서 문자의 의미로 다루고 있다.
한국만 예술 장르로 보니 독트갛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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