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붓글씨를 배우게 된 것은 아버지 덕이었다.
5-6세라고 기억한다. 시골의 사랑방에서 겨울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 꿇어앉아 천자문을 읽은 것이 곧 붓글씨를 쓰게 된 것 같다. 천자문이라야 몇 줄 정도 읽었겠지 책을 다 읽은 기억은 없다. 사랑방이 곧 아버지가 늘 계시던 방이고 손님이 오시면 주무시고 하시던 방이었다. 아침이 되면 손님의 세숫물을 떠다 드리고 하였다. 아버지책상(앉은 책상)위에는 벼루집이 있어서 붓글씨를 쓸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겨울에는 글을 읽었지만 여름이 되면 농사일이 바빠서인지 한문을 읽지 않았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비료포대(돌가리포대)라고 하던 누렇고 두꺼운 종이 혹은 신문지 조각에 (종이모양도 일정치 않고 찢어졌으면 찢어진 대로) 한(漢)자를 몇 자 써 놓으셨다. 그냥 써 놓으셨지 누구보고 써 보라고도 하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 옆에 아버지의 붓글씨 도구로 그려보았다.(썼다기 보다는 그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한 번에 한 자를 그리기도 하고 한 줄을 그리기도 하다가 그 종이에 가득 써서 더 쓸 곳이 없어지면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다시 새로운 종이에 몇 자를 써 놓으셨다. 이렇게 하다 보니 글자도 익혀지고 글씨도 점점 모양을 갖추어 간 것 같다.
그러다 입춘절에 입춘을 아버지가 먼저 써 놓으시고 써 보라고 하시면 나도 문종이(한지. 창호지)에 써 보았다. 그러면 글씨라고도 할 수 없는 삐둘삐둘한 것을 우리 집 벽에 붙여두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4학년이 되어 습자 시간에 한글을 쓰니 그래도 그것도 글씨를 써 보았다고 한 번도 써보지 않는 다른 아이들보다는 더 잘 썼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지구별 대회에 나가서 입상한 것이 서예로는 처음 상을 타게 된 것이다. 대회준비를 한다고 선생님이 제목을 내어주고 써 오라고 하면 아무리 써 보아도 선생님처럼 되지 않아 붓이 부드러워서 그렇다고 무릇을 짓이겨서 붓에 먹여보기도 하고 그래도 붓이 훌렁훌렁하여 뻣뻣하게 한다고 실로 붓 허리를 묶어서 써 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이 때부터, 아버지가 동네에 붓으로 하는 일은 도맡아 하셔서 남의 사돈지도 쓰셨는데 같은 글을 여러 장 쓰시면서 나보고도 써 보라고 하여 사돈지를 여러 번 썼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붓과 가까이 하게 되었고 거기다가 사범학교를 나오게 되니 교실환경정리를 하는데 붓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나왔을 때는 군사혁명전이라 교실환경은 거의 붓으로 하였다. 그 때는 교실마다 교훈과 급훈을 써 붙여야 했는데 나는 잘은 못 써도 그런대로 써서 붙였는데 어떤 선생님은 붓글씨를 전혀 쓰시지 못 하는 분도 있어서 대신 써 드리기도 하다 보니 자주 붓을 접하게 되니 점점 잘 쓸 수 있었다. 졸업대장(그 때는 붓으로 졸업대장을 썼다.)도 쓰고 하였다. 조금 지나니 학교의 붓으로 하는 일은 내가 거의 하게 되어서 어린 나이에 잘 하는 줄 알고 열심히 하였다. 이렇게 한글은 그냥 쓴다고 썼다.
그러다가 사업을 한다고 (그 때는 교직원의 월급이 적어서 겨우 하숙비가 될 정도) 사표를 내고 나왔으나 사업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번 돈 다 없에고 다시 교사시험을 쳤다.
이 때 승진(교장,교감)을 하려고 보니 7년이나 놀아서 점수가 안 되었다. 그래서 남들은 승진 공부하는데 나도 무엇이라도 해야 될 것 같아 이것저것 생각해보니 운동이나 바둑 등 게임은 상대가 있어야 되기에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다보니 서예를 다시 하게 되었다.
전에는 예쁜 것이 글씨의 전부인 줄 알았기에 이번에는 서예의 본질을 알아보려고 생각하고 집 근처의 서실에 갔더니 한 달을 하고 그만 두었다. 왜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서예와는 거리가 멀었다. 글씨를 다듬고 있었기에 내가 추구하는 글씨가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대구에서 가장 중심지인 구 대구은행 본점 앞의 서실을 찾았다. 대구에서 가장 중심지이니 잘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쌍학명”이라는 안진경풍의 글씨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6개월을 쓰고 나니 동료들이 내 것과 선생님 체본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서실을 그만 두고 서울에 있는 죽봉 황성현 서실에 우편 등록을 해놓고 1주일에 한 번씩 체본이 내려오면 연습을 해서 올려 보내면 수정을 받고 다시 체본을 내려보내어 주는 방법을 2년간 하였다. 방학 때 서울 올라가서 직접 한 번 만나 보니 이것도 아니다 싶어서 이 때부터 헤매기 시작하였다. 서예의 본질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율산 이홍재 서실(그 때는 향촌동에 있었음)을 찾아가서 구성궁예천명을 써 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6개월을 써보고 구성궁예천명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을 하기에 그만 두었다. 그리고 문화사(지금의 문성사)에 종이를 사러가서 고충을 이야기 하였더니 장사구사장이 서산서실에 가보라고 하였다. 그 때 서산은 동인호텔 곁 건물 삼층에서 서실을 하였다. 가 보았더니 지금까지 내가 배웠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한 3개월은 체본만 받아서 쓰지도 못하였다. 글씨 안 쓰고 있는 내가 딱해보였던지 하루는 선배인 도무열씨가 이야기 좀 하자고 하여 다방에서 하시는 말씀이“나도 송재서실(도의석선생님)에서 3년을 썼는데 안 되는 획 (직각이나 삼각형 같은 각이 진 획은 전혀 안 되어서)이 있어서 족친이지만 아닌 것 같아서 이리로 왔는데 한강 이남에서는 서산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고 대구분들이 서울 여초를 찾아가서 글씨를 배우겠다고 하면 대구에 서산이 있는데 왜 서울까지 올라오려고 하느냐? 는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같이 해보자고 하였다. 그러면서”광예주쌍집“이라는책을 권해 주었다. 그 날 서실을 마치고 필방에 가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도통 모르는 말들만 있었다. 읽다가 모르는 말이 있으면 선배에게 물어보고 선배도 모르면 선생님에게는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줄만 쳐 놓고 읽고 또 읽고 이러기를 여러번 하였다. 그러다가 다른 책 예주쌍집, 서개, 서예전과, 논서승어, 서예란 무엇인가? 서보, 추사집, 서법서론, 서여기인 등 여러 가지 서예이론책을 읽으면서 서예의 본질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서는 가끔 선생님과 茶를 마시게 까지 되었을 때 기회를 보아서 여쭈어 보기도 하고 서예전시회도 보러 다녔다. 심지어 대전까지도 갔다. 이 때 서산선생님은 동아미전에서 최고상을 받아서 동아일보에서는 행서로서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게 되었다. 서울의 전정우씨 서예평론가 정충락씨 등의 이야기도 듣고 대구의 영남대 명예 교수 모산 심재완 씨의 이야기도 들었다. 심재완씨의 이야기는 대구에서 제일 먼저 육조체(해서체의 한 가지)를 쓴 사람이 서산이라는 말과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서산이 경북도전(대구시와 분리되기전)에 육조체를 써서 출품했더니 왕00( 그 때 당시는 대구에서는 내노라하는 위인이었으며 지금도 곳곳에 글씨가 남아 있음)이라는 심사위원이 같이 심사하면서' 이것을 글씨라고 썼느냐? 라면서 잡아 떼 내더라는 것이다.
모산선생님이 입상대열에 올려놓으면 왕이라는 분은 낙선 쪽으로 떼어내고 자기의 제자 글씨는 낙선 쪽에 있으면 이 글씨 좋지 않나 하면서 입상 쪽으로 올려붙이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산선생님께서 이 글씨는 육조체라는 해서의 한 종류입니다라고 설명을 하고 붙여놓았더니 다시는 잡아떼지 않더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왕이라는 심사위원은 그 때까지 육조체를 구경도 못했다는 뜻이었다.
이 때 서산선생이 쓰던 붓은 필관이 호 길이의 1.5배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필관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면 붓은 필관의 아래를 잡아야하는데 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모두 별도로 필관의 길이가 짧은 붓을 맞추었다. 지금도 몇 자루는 짧은 필관이다. 벼루도 맞추러 고령운수 벼루공장까지 가서 맞추어 오기도 하였다. 이 때는 정말 열심히 하였다. 어떤 사람은 서실에 자면서 공부를 하는 분도 있었다.
그래서 서산은 필관이 짧고 호는 긴 붓을 쓰기 때문에 글씨를 잘 쓴다는 소문이 나서 필방에 오는 사람이 간혹 서산이 쓰는 붓을 사 간다는 말이 퍼졌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사람은 없고 그저 소문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성사에 종이를 사러 갔더니 어느 분이 들어오시자마자 문성사사장에게 서산이 쓰는 붓을 내 놓으라고 하더니 필관은 짧고 호는 긴 붓을 내어놓으니 두 말 하지 않고 값을 치루는 것을 보고서야 떠도는 소문이 사실임을 알았다. 어쨌든 필관이 짧고 호가 긴 붓은 서산이 유행시킨 것이 틀림없다. 지금은 아마 대구시 서예인들 대부분이 호가 긴 붓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때는 거의가 호의 길이가 지금의 2/3정도 되는 것을 사용했던 것 같다.)
이런 가운데 다른 사람의 글씨는 어떤가 싶어서 대구에 있는 큰 서실을 겨울 방학동안 하루에 한 서실씩 방문을 해보았다.
영남서실(서근섭), 동애서실(소효영), 송재서실(도의석), 심재서실(정계조), 경북서실(유영희), 묵제서실(조용철), 율산서실(이홍재), 화촌서실(문영렬),
대동서실 우상홍서실 청오서실 등 거의 돌아다녀보았다.
상록서실과 송하(백영일)서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는 서실이라 몇 번씩을 가 보았던 서실이었다.
이런 가운데 하나하나 터득을 하게 되어갔다. 그러면서 우리서실에서도 관심이 있는 사람끼리 승묵회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한 해 한 두 번씩 산천을 찾아 풍광 좋은 곳(팔공산, 지리산, 동해의 화진포 등)에 가서 서론을 익히면서 획을 그어보기도 하다가 회원 전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붓 잡는 방법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필관(잡는 부분)을 잘라서 주머니에 넣고 5년을 다니다가 잃어버려서 그 이후에는 붓 잡는 법은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집사람이“당신은 왜 서예를 그 만큼 많이 했으면서 상장이 없느냐”고 하기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싶어서 경상북도전을 시작해서 전국대회까지 상장이 몇 장이 된다. 그러나 입상정도이지 그 이상의 상장은 없다. 그 이상을 원하지도 않았고 실력도 입상정도이지 그 이상은 안 된다고 스스로 믿는다.
관청에서 주도하는 공모전은 경북도전 뿐이어서 출품했더니 심사하신 위대하신 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로 자기가 입상을 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은 같은 서실에서 공부하던 장00이라는 사람으로 같이 공부를 하면서 나 보다 먼저 시작하여 심사위원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심사하기 전에는 전혀 말이 없다가 내가 입상을 하고 나니 자기가 힘 썼노라고 인삼을 요구하여서 아는 사이라 더럽지만 인삼을 사다주고 다시는 경북과 대구의 공모전에는 출품하지 않았다.
오늘 상 타면 내일 글씨가 달라진다면 상을 타야지만 상장이란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굳혔기 때문에 상에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공모전에 작품을 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내가 출품하기 몇 년 전에 대구시 대상작품이 위작이었다는 공청회를 고려가든에서 하였다.
이 때 내가 대구시 심사위원들과 토론을 하면서 정실에 치우친 심사를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출품하고픈 마음이 없어졌다.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모전 전시회를 할 때 우연히 우리 가족이 서울을 갈 기회가 있어 간 김에 전시회를 둘러보자고 하여 서울처남과 동서 등 친척과 함께 갔다가 입구에서 쫓겨날 번 하였다. 입장료를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내 작품 내가 보는데 돈을 내어야 하느냐?”고 반문하니 이름을 대어라는 것이다. 이름과 작품명을 대었더니 도록에서 찾아보니 작품에 석포라고 호만 써서 이름이 없었던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입장을 시켰다. 나오면서 도록을 받아 온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