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 사진은 2014년 6월 15일 내가 직접 답사해서 촬영한 것이다.
(퍼옴)
경지에 이르자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또다시 바뀌게 되었다. 그의 글씨는 그가 갖게 된 천진한 성품과 순수하고 맑은 인품을 드러내게 되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의 예술은 무르익어 졸박拙撲한(꾸밈이 없고 천진하며 겸손한) 글씨에 도달하였다.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죽음을 앞두고 그는 마지막 글씨를 쓰게 되었다. 마침 서울의 강남에 있는 옛절 봉은사에서는 화엄경의 목판을 보관할 집을 짓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이 새로 짓고 있는 집의 현판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추사 김정희의 절필絶筆(마지막 작품)이 된 이 두 글자에는 그의 마지막 마음과 예술의 경지가 잘 표현되어 담겨있다. 평생 서예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살아온 추사 김정희의 정신과 마음은 이제 성숙하여 자유로워지고 단순미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이런 마음이 그대로 붓끝을 통하여 작품화 된 것이 ‘板殿’ 두 글자이다. 그는 이제 마음을 비우고 허허실실한 가운데 마침내 졸한 글씨를 쓰게 되었다.
이 작품은 서울 강남의 무역센터와 경기고등학교의 사이에 위치한 옛 절 봉은사奉恩寺 안에, 대장경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통 사찰 건물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이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인<판전板殿>은 봉은사를 찾아가면 쉽게 발견하고 감상할 수 있다. 나는 때때로 대웅전에 예불을 올리고 더불어 추사 김정희의 이 위대한 작품을 보기 위하여 봉은사를 찾는다. 그때마다 나는 죽음을 앞둔 일흔 한 살의 추사 김정희가 왜 저렇게 어린아이가 쓴 글씨와 같은 작품을 남겼을까 생각하여 보곤 한다.
추사 김정희가 쓴 이 글씨는 한마디로 서당에 다니던 어린이가 쓴 글씨와 같이 보여 흔히 동자체童子體의 글씨라고 한다. 추사체의 음양이 분명하고 교체되고 대비되는 획도 없고 속도감도 덜하며 완벽한 구성의 결구를 갖춘 글씨도 아니다. 그저 글씨를 배우는 학동學童이 아무런 작의作意도 없이 천진난만하게 쓴 글씨와 같아 보인다.
노자는 진정한 기교는 천도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기교는 손과 마음이 일치하였을 때 자유자재로 붓을 움직여 낼 때 진실된 기교가 나오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과 손이 일체가 된 경지는 오랜 숙련과 정신적 수양의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경지는 익으면 익을수록 단순해 졌다. 그 단순함 속에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학적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의 단순함 속에는 도가의 무위無爲 사상과 불교 선禪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가 녹아 있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이해한 대교약졸은 단순히 기교가 없는 단계가 아니라, 기교를 다 한 다음에 더 이상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는 초탈超脫의 경지다. 또한 추사가 이해한<불립문자>의 경지도 문자가 소용없다는 것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이치를 잘 터득하고 난 다음에 더 이상 문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초월과 벗어남의 경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글씨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평가할 때 제일 중요하게 쓰이는 개념의 하나인 ‘졸拙’의 경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추사 김정희가 그렇게 추구하고자 하였던 경지인 불계공졸不計工拙(잘되고 못 되고를 가리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추사 김정희에 있어서 ‘졸拙’은 단순함이다. 추사체라는 고도의 고답적이며 이념적이었던 글씨가 다시 한번 변용되는 과정에서 파격적으로 단순화되어 순수화된 글씨다. 즉 극도의 교巧-기교의 세계를 거쳐 다시 원초적인 순수화된 글씨다. 즉 극도의 교巧(기교)의 세계를 거쳐 원초적인 순수함으로 되돌아온 다음에 다시 차원을 높여 단순하게 환원된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는 동양정신, 동양의 미학정신의 근원적인 귀결점인 것이다. 동양의 미의식은 잠재적으로 그 밑바탕에 도가적道家的인 미학사상을 깔고 있는데, 여기에는 노자老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철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 4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大成若缺 대성약결 크게 완성되어 있는 것은 마치 결함이 있는 듯하지만
其用不弊 기용불폐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
大盈若沖 대영약충 크게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있는 듯하여
其用不窮 기용불궁 그 쓰임에 끝이 없다
大直若屈 대직약굴 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大巧若拙 대교약졸 큰 솜씨는 마치 서툰듯 하며
大辯若訥 대변약눌 큰 말솜씨는 마치 어눌한 듯하다
躁勝寒 조승한 분주하게 움직이면 추위을 이길 수 있고
靜勝熱 정승열 고요히 차분하게 있으면 더위를 이긴다
淸靜爲天下正 청정위천하정 맑고 고요하면 천하의 바름을 이룬다
노자는 서로 모순된 듯한 두 개의 개념 속에 숨은 보완성과 상호 의존성을 깊이 이해한 끝에, 그 둘을 함께 품고 또한 뛰어넘은 대자연의 변화와 생성의 천진天眞을 깨달아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결국 칠십평생을 열심히 공부하며 예술의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 온 추사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경지도 노자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마침내 노자가 말한 청정淸靜을 통한 천하정天下正과 無爲而無不爲(함이 없으나 하지 않는 것이 없음)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바로 동양의 모든 예술가들이 도달하고자 꿈꿔온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죽음을 앞둔 추사 김정희는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천하의 바른 길로 돌아가며,
함이 없으나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완성의 미감으로 가득한 글씨를 마지막으로 쓰고 남긴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평생 글씨 공부를 통하여 기교의 극치에까지 도달하였다. 그 동안 써왔던 세련된 글씨, 심하게 변형된 파격의 미학을 품은 글씨를 넘어 이제 천진의 미학, 노자가 말한 참다운 아름다움의 세계를 터득하였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돌아가 마지막에는 졸한 글씨를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어려서 글씨를 배울 때 이런 천진한 글씨를 썼을 것이다. 그후 평생 글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많은 연구를 하며 기교를 부렸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또다시 이 모든 기교를 넘어 천진한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예술의 변증법적 종합이며, 그의 사상의 주역적 변신이며, 그의 사상의 도가적 회귀이며, 그의 글씨의 불교적 해탈이다. 즉 추사 김정희의 예술은 동양사상의 근원으로 환원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규격의 틀과 법식의 제약, 형식의 답답함을 벗어나 천진한 동심에서 다시 붓을 들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추사 김정희에게는 방필이나 원필과 같은 필법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 또한 평생을 연구하고 닦아온 비학이며 첩학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붓 하나에 융합된 추사체의 궁극인 동자체가 있을 뿐이다.
그는 극단의 기교를 거친 다음,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비로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였던 고졸古拙한 글씨의 세계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옛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고, 옛 사람들의 비석에서 찾았던 아름다움을 찾은 것이다. 마침내 그가 찾아 헤매었던 것을 찾았고 이 글씨를 마지막으로 대자연大自然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일흔이 되어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아버님의 묘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살며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바로 이 ‘板殿’ 글씨가 걸린 봉은사의 스님에게서 구족계具足戒까지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추사가 유배지에서 돌아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이다. 추사 김정희는 말년을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소문에는 ‘板殿’의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이 글씨체를 후세의 사람들은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몰두하였던 예술의 모든 결말이 담기어 있는 이 편액의 왼쪽 끝에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는 마지막 낙관의 글씨가 덧붙어 있다.<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 과노果老, 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제 죽음을 앞두고 모든 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로 받아들이고 모든 원한과 서러운 마음을 떨쳐버렸을 것이다. 이제 추사 김정희는 그가 겪고 살아온 파란의 역사와 정치와 인생에 있어 선과 악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세속의 이해타산을 넘어 천진한 인간이 있고, 이런 인간됨만이 뜻있음을 깨쳐알게 되었다. 따라서 최후에 쓴 ‘과果’ 자가 들어 있는 호들은 그의 이런 성숙하고 무르익은 마음까지도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판전>의 글씨를 쓸 때 이미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닥쳤음을 느끼고 알고 있은 듯 하다. 그는 이 글씨를 쓰기에 앞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 글씨를 쓴 다음 사흘 지나 파란 많았던 이 생의 삶을 홀연히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까닭에 사망하였다거나 죽었다고 하기보다는 입멸入滅 또는 입적入寂하였다고 하는 표현이 추사 김정희에게는 더 어울릴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세한도>와<불이선란도>그리고<판전>으로 이어지는 말년의 경지는 삶과 예술의 해탈과정이다. 그는 마침내 이승의 한 많은 삶과, 이 승의 사람들과의 얽히고 설킨 인연과 갈등, 이승의 복잡한 학문의 체계를 훌훌히 벗어나 해탈하고 천진天眞으로 돌아간 것이다.
[출처] 추사 김정희의<판전板殿>글씨|작성자 마음평화
경지에 이르자 추사 김정희의 글씨는 또다시 바뀌게 되었다. 그의 글씨는 그가 갖게 된 천진한 성품과 순수하고 맑은 인품을 드러내게 되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의 예술은 무르익어 졸박拙撲한(꾸밈이 없고 천진하며 겸손한) 글씨에 도달하였다.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죽음을 앞두고 그는 마지막 글씨를 쓰게 되었다. 마침 서울의 강남에 있는 옛절 봉은사에서는 화엄경의 목판을 보관할 집을 짓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이 새로 짓고 있는 집의 현판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추사 김정희의 절필絶筆(마지막 작품)이 된 이 두 글자에는 그의 마지막 마음과 예술의 경지가 잘 표현되어 담겨있다. 평생 서예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살아온 추사 김정희의 정신과 마음은 이제 성숙하여 자유로워지고 단순미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이런 마음이 그대로 붓끝을 통하여 작품화 된 것이 ‘板殿’ 두 글자이다. 그는 이제 마음을 비우고 허허실실한 가운데 마침내 졸한 글씨를 쓰게 되었다.
이 작품은 서울 강남의 무역센터와 경기고등학교의 사이에 위치한 옛 절 봉은사奉恩寺 안에, 대장경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통 사찰 건물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이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인<판전板殿>은 봉은사를 찾아가면 쉽게 발견하고 감상할 수 있다. 나는 때때로 대웅전에 예불을 올리고 더불어 추사 김정희의 이 위대한 작품을 보기 위하여 봉은사를 찾는다. 그때마다 나는 죽음을 앞둔 일흔 한 살의 추사 김정희가 왜 저렇게 어린아이가 쓴 글씨와 같은 작품을 남겼을까 생각하여 보곤 한다.
추사 김정희가 쓴 이 글씨는 한마디로 서당에 다니던 어린이가 쓴 글씨와 같이 보여 흔히 동자체童子體의 글씨라고 한다. 추사체의 음양이 분명하고 교체되고 대비되는 획도 없고 속도감도 덜하며 완벽한 구성의 결구를 갖춘 글씨도 아니다. 그저 글씨를 배우는 학동學童이 아무런 작의作意도 없이 천진난만하게 쓴 글씨와 같아 보인다.
노자는 진정한 기교는 천도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기교는 손과 마음이 일치하였을 때 자유자재로 붓을 움직여 낼 때 진실된 기교가 나오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과 손이 일체가 된 경지는 오랜 숙련과 정신적 수양의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경지는 익으면 익을수록 단순해 졌다. 그 단순함 속에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학적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의 단순함 속에는 도가의 무위無爲 사상과 불교 선禪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가 녹아 있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이해한 대교약졸은 단순히 기교가 없는 단계가 아니라, 기교를 다 한 다음에 더 이상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는 초탈超脫의 경지다. 또한 추사가 이해한<불립문자>의 경지도 문자가 소용없다는 것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이치를 잘 터득하고 난 다음에 더 이상 문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초월과 벗어남의 경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글씨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평가할 때 제일 중요하게 쓰이는 개념의 하나인 ‘졸拙’의 경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추사 김정희가 그렇게 추구하고자 하였던 경지인 불계공졸不計工拙(잘되고 못 되고를 가리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추사 김정희에 있어서 ‘졸拙’은 단순함이다. 추사체라는 고도의 고답적이며 이념적이었던 글씨가 다시 한번 변용되는 과정에서 파격적으로 단순화되어 순수화된 글씨다. 즉 극도의 교巧-기교의 세계를 거쳐 다시 원초적인 순수화된 글씨다. 즉 극도의 교巧(기교)의 세계를 거쳐 원초적인 순수함으로 되돌아온 다음에 다시 차원을 높여 단순하게 환원된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는 동양정신, 동양의 미학정신의 근원적인 귀결점인 것이다. 동양의 미의식은 잠재적으로 그 밑바탕에 도가적道家的인 미학사상을 깔고 있는데, 여기에는 노자老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철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 4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大成若缺 대성약결 크게 완성되어 있는 것은 마치 결함이 있는 듯하지만
其用不弊 기용불폐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
大盈若沖 대영약충 크게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있는 듯하여
其用不窮 기용불궁 그 쓰임에 끝이 없다
大直若屈 대직약굴 크게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大巧若拙 대교약졸 큰 솜씨는 마치 서툰듯 하며
大辯若訥 대변약눌 큰 말솜씨는 마치 어눌한 듯하다
躁勝寒 조승한 분주하게 움직이면 추위을 이길 수 있고
靜勝熱 정승열 고요히 차분하게 있으면 더위를 이긴다
淸靜爲天下正 청정위천하정 맑고 고요하면 천하의 바름을 이룬다
노자는 서로 모순된 듯한 두 개의 개념 속에 숨은 보완성과 상호 의존성을 깊이 이해한 끝에, 그 둘을 함께 품고 또한 뛰어넘은 대자연의 변화와 생성의 천진天眞을 깨달아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결국 칠십평생을 열심히 공부하며 예술의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 온 추사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경지도 노자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마침내 노자가 말한 청정淸靜을 통한 천하정天下正과 無爲而無不爲(함이 없으나 하지 않는 것이 없음)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바로 동양의 모든 예술가들이 도달하고자 꿈꿔온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죽음을 앞둔 추사 김정희는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천하의 바른 길로 돌아가며,
함이 없으나 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완성의 미감으로 가득한 글씨를 마지막으로 쓰고 남긴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평생 글씨 공부를 통하여 기교의 극치에까지 도달하였다. 그 동안 써왔던 세련된 글씨, 심하게 변형된 파격의 미학을 품은 글씨를 넘어 이제 천진의 미학, 노자가 말한 참다운 아름다움의 세계를 터득하였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돌아가 마지막에는 졸한 글씨를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어려서 글씨를 배울 때 이런 천진한 글씨를 썼을 것이다. 그후 평생 글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많은 연구를 하며 기교를 부렸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또다시 이 모든 기교를 넘어 천진한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예술의 변증법적 종합이며, 그의 사상의 주역적 변신이며, 그의 사상의 도가적 회귀이며, 그의 글씨의 불교적 해탈이다. 즉 추사 김정희의 예술은 동양사상의 근원으로 환원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규격의 틀과 법식의 제약, 형식의 답답함을 벗어나 천진한 동심에서 다시 붓을 들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추사 김정희에게는 방필이나 원필과 같은 필법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다. 또한 평생을 연구하고 닦아온 비학이며 첩학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붓 하나에 융합된 추사체의 궁극인 동자체가 있을 뿐이다.
그는 극단의 기교를 거친 다음,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비로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였던 고졸古拙한 글씨의 세계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옛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고, 옛 사람들의 비석에서 찾았던 아름다움을 찾은 것이다. 마침내 그가 찾아 헤매었던 것을 찾았고 이 글씨를 마지막으로 대자연大自然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일흔이 되어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아버님의 묘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살며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바로 이 ‘板殿’ 글씨가 걸린 봉은사의 스님에게서 구족계具足戒까지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추사가 유배지에서 돌아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이다. 추사 김정희는 말년을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소문에는 ‘板殿’의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이 글씨체를 후세의 사람들은 ‘동자체童子體’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몰두하였던 예술의 모든 결말이 담기어 있는 이 편액의 왼쪽 끝에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는 마지막 낙관의 글씨가 덧붙어 있다.<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 과노果老, 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제 죽음을 앞두고 모든 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로 받아들이고 모든 원한과 서러운 마음을 떨쳐버렸을 것이다. 이제 추사 김정희는 그가 겪고 살아온 파란의 역사와 정치와 인생에 있어 선과 악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세속의 이해타산을 넘어 천진한 인간이 있고, 이런 인간됨만이 뜻있음을 깨쳐알게 되었다. 따라서 최후에 쓴 ‘과果’ 자가 들어 있는 호들은 그의 이런 성숙하고 무르익은 마음까지도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판전>의 글씨를 쓸 때 이미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닥쳤음을 느끼고 알고 있은 듯 하다. 그는 이 글씨를 쓰기에 앞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이 글씨를 쓴 다음 사흘 지나 파란 많았던 이 생의 삶을 홀연히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봉은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까닭에 사망하였다거나 죽었다고 하기보다는 입멸入滅 또는 입적入寂하였다고 하는 표현이 추사 김정희에게는 더 어울릴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세한도>와<불이선란도>그리고<판전>으로 이어지는 말년의 경지는 삶과 예술의 해탈과정이다. 그는 마침내 이승의 한 많은 삶과, 이 승의 사람들과의 얽히고 설킨 인연과 갈등, 이승의 복잡한 학문의 체계를 훌훌히 벗어나 해탈하고 천진天眞으로 돌아간 것이다.
[출처] 추사 김정희의<판전板殿>글씨|작성자 마음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