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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의 자식 교육

吳鵲橋 2016. 5. 15. 06:56



도연명의 자식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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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陶淵明)의 자식 교육
입력 : 2014.12.29 22:16 | 수정 : 2014.12.29 22:17
중국 동진시대 시인인 도연명(陶淵明·365~427년)은 전원시인으로 유명하다. 일찍이 하급관리 생활을 시작했으나 매일 밤 외빈 접대에 나가야 하는 생활에 염증을 내고 “쌀 다섯말(斗)의 녹봉을 받기 위해 소인들에게 허리를 굽힐 수는 없다”며 귀농(歸農)한다. 하지만 큰 고민이 있었다. 자식 교육이었다.
도연명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나태했으며 놀기를 좋아했다. 도연명 나이 43세에 큰아들 엄(儼)은 16세가 되었으나 게으르기 그지없어 다른 사람이 놀랄 정도였다. 둘째 사(俟)는 지학(志學·15세)을 앞두고도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고, 셋째 빈(份)과 넷째 일(佚)은 둘다 13세인데 6과 7도 구분하지 못했다. 아홉살이 다 된 막내 동(佟)은 배나 밤 등 먹을 것만 찾았다. 그래서 조상들의 영광을 담은 훈육시까지 지어가며 공부를 독려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도연명은 결국 “하늘이 준 자식운이 참으로 이러하니 술잔이나 기울이는 것이 낫다[天運苟如此, 且進杯中物]”고 탄식한다.

300여년 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712~770)는 도연명을 비판한다. “자식이 있으면 현명한 아이도 있고, 우둔한 아이도 있기 마련인데 세상을 피해 은둔한 사람이 어찌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는가.”
하지만 두보 역시 자식 걱정은 마찬가지였다. 큰 아들 종문(宗文)은 이름에 문(文)자까지 넣었지만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보는 둘째 아들 종무(宗武)에게 “우리는 대대로 시인 집안”이라며 시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종무는 전란속에 후난성 일대를 떠돌다가 죽어 시 작품이 남아 있지 않다. 다른 아들은 어릴 때 굶어 죽었다. 전란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두보도 자식 교육에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도연명이나 두보는 그래도 자식 교육에 대한 열의가 상당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백(李白·701~762)이 자식 교육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들 2명과 딸 1명이 있었으나 청산(靑山)과 공명(功名)에 뜻을 두었기에 자손들은 불우했다. 역사서 신당서에 따르면 황족의 피를 받은 이백은 손자대에 2명의 손녀를 두었는데 모두 평민의 아내였다.
도연명과 이백, 두보는 모두 일류 시인들이다. 자식들은 최고의 ‘언어영역’ 선생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자식의 나태나 아버지의 무관심 때문에 자식 농사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학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도연명이나 두보 보다는 천배, 이백 보다는 천만배 더 깊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입시생 부모들의 마음은 천금같이 무겁다. 부모간 서열이 자녀의 성적순이라고 믿는 세태 때문에 입시 발표 후 친목 모임을 끊어버리거나 시부모·친정부모 보기가 겁난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 뜻대로 안되었다고 어찌 자식을 탓하랴.
도연명의 막내 동은 나중에 농부가 됐다. 동은 학문을 권하는 아버지의 면전에서 “글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나는 공부도, 학자도 싫어해요”라며 대들기도 했다. 하지만 도연명은 괘념치 않았고 만년에 막내아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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