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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버지 1

吳鵲橋 2024. 6. 8. 13:05

 

 

.5.아버지

현대 교육은 받으시지 않으셨지만 한학을 하셔서 한글은 자연히 깨우치신 분이시다. 동네의 행사는 늘 주관을 하셨고 명절()이 되면 토정비결을 보러 오시는 동네 분들이 많이 계셨다. 그 분들께 신수점 하듯이 토정비결을 보시고 종이에 적어 주시기도 하시고 그냥 이야기만 해주시기도 하셨다. 정월 초하루룰 제외하고 며칠동안은 토정비결을 보아주셨던 것 같다. 당시 사람(아버지세대)들은 거의가 글을 몰랐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대신 보아주셨던 것이다. 한의학을 스스로 공부하셨기 때문에 동네에 아픈 분이 계시면 물으려 오셨고 약도 지어주셨다. 화제(약 짓는 재료를 적은 것)라는 것을 써 주셔서 건재약방에 가서 약을 짓도록 하셨다.

겨울만 되면 다래끼(싸리나무로 엮어 만든 물건 담는 것인데 어께에 멜수 있는 기구)를 메고 산으로 가셔서 약초를 캐 오셨다 .백출(위장에 좋다고 함)이라는 약을 주로 캐신 것 같고. 봄에는 반하라는 약을 캐신 것 같다.

복령도 캐 오셨는데 요즈음 텔레비전을 보면 쇠꼬쟁이로 땅속을 찔러서 복령을 찾던데 아버지는 어떻게 복령을 찾으셨는지 쇠꼬쟁이는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캐온 복령은 깨끗하게 씻어서 약 써는 작두로 썰어서 말려서 봉지를 만들어서 사랑방 천장에 매달아놓으셨다가 필요할 때 쓰신 것 같다. 복령 이외에도 각종 약초봉지가 사랑방 천장 서까래에 매달려 있어서 사람방에만 들어가면 약초냄새가 풍겼다.

산에 가시지 않는 날은 종이를 다듬었다. 한지(창호지)는 포슬포슬하여 글씨가 잘 써지지 않기 때문에 다듬잇돌 위에 얹어놓고 방망이로 두들기기도 하고 방바닥에 펴놓고 밟기도 하였다. 나는 가끔 아버지 일을 도와서 종이 다듬기도 도와드렸다.

나는 이 때부터 글씨와 인연을 갖게 된 것 같다.

다듬은 종이로는 겨울 내내 책을 모사(베껴 씀)하셨다.

산서(풍수지리서) 아니면 고서들을 모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봄부터 가을까지 마루 끝에 노 걸이(삼이나 닥나무껍질로 만든 굵은 실 -초석자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날줄)를 만들어놓고 점심 식사 후 잠시 쉴 참에 비비거나 저녁식사 후 틈틈이 비볐다. 그래서 나도 어쩌다가 한 번씩 비벼보기도 하여 지금도 노를 비빌 줄 안다.

우리 집 앞의 논에 왕골(초석자리 만드는 풀)을 조금 심어서 자리를 만들때 노를 이용하였다. 때로는 안개 장까지 가서 왕골을 사 오셔서 겨울 내내 자리를 쳐서 팔기도 하였다. 가마니나 자리를 칠 때 나는 자(짚이나 왕골을 넣는 기구)질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들을 공부시키신 아버지였다.

농사일은 잘 못 하셨다. 그래서 매우 어렵게 농사를 지으셨다.

논갈이 같은 것을 잘 못 하셔서 늘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약이나 사돈지(결혼하면 사둔에게 쓰는 편지)를 써 주실 때 돈을 받으라고 농사일 할 때 논 갈아 달라고 하니 돈 안 받더냐 라고 말씀 드렸으나 한 번도 돈을 받으시는 것을 보지 못 했다.

어떤 특별한 말씀은 하시지 않으셨지만 늘 웃는 얼굴로 계셨다. 어머님이 어떤 잔소리를 하셔도 그냥 웃으시기만 하신 인자한 분이셨다.

교육은 어떻게 공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냥 비료포대(비료를 넣었던 종이포대)종이라고 비료를 다 쓰고 나면 그 종이를 펼쳐서 漢字 몇 자를 붓으로 적어 놓으셨다.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누구보고 쓰라고도 안 하시고 그냥 적어 놓으시면 대개 내가 붓으로 쓰곤 했다. 한 장을 다 쓰면 다시 새로운 종이에 적어놓으셨다. 그래서 아마 내가 글씨를 잘 쓰게 된 것 같다. 이것이 아버지 교육 방침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약 40년 동안 교육에 종사한 나보다도 아버지 교육방법이 더 훌륭하신 것 같다.

이 때 적어놓으신 글 중 朱子十悔訓이란 것이 있었는데 한 번도 설명을 해주시지 않으셨지만 뜻은 스스로 이해를 하였던 것 같다.

천자문을 읽었고 중학교 때는 한문 과목이 있었기 때문에 한자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한 것 같다

주자가 10가지 후회한다는 교훈을 말한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언제나 책을 읽고 계셨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으셨다.

책 읽으면 밥이 나오느냐 돈이 나오느냐? ...

 

손님이 오시면 사랑방에 모셔놓으시고 자식을 불렀다. 누구라도 보이는데로 그러면 반드시 손님에게 인사를 올리게 하시고 집의 둘째일세 하고 소개를 해주셨다. 그러면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술상이 들어오면 받아서 술 따르는 시중을 들었다. 술상이라야 막걸리에다가 김치 안주이지만 손님이 오시면 꼭 술상은 차렸다.

아마 朱子十悔訓 中 不接賓客去後悔란 말을 실천 하신 분이시다.

(손님을 대접하지 않으면 간 뒤에 후회한다)

이러니 예절은 자연히 몸에 베이게 된 것이다.

본분을 지켜라.(특별히 말씀은 안 하셔도 아버지가 해 오신 것으로 보아 이런 뜻을 가지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