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때부터 벼슬을 한 황희정승은 여러임금을 성긴 분으로만 알았었는데...
고려의 관료 황희는 나라가 망하자 은거에 든 두문동 72현의 한 살마으로 태조 이성계가 발탁하여 조정으로 데려와서 세종까지 벼슬을 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태종과 세자를 세우는데 의견 차이로 관직과 과전을 몰수 당하고 유배를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격조에 어울리지 않게 3남 1년는 크고 작은 시빗거리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아버지 밑에도 불양한 자식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장남은 성추문을 일으킨 사대부중의 한 사람이었다. 관리로서 창기와 유숙한 죄로 파직
하나뿐인 사위는 이사를 하지 않는 아전을 때려 숨지게 한 죄로 의금부에 투옥
둘째는 부정축재로 11년 추방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도 말썽을 일으켜서 자식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여서 사퇴를 간청청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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