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사문화재 42

달구벌(대구)을 상징하는 돌거북이

오늘 (2023. 12. 6) 고향 친구 5명이 다달이 돌아가면서 밥을 먹는 모임이다. 오늘은 내가 당번인데 지난번 모임때 시대 고가촌에서 하기로 하여서 당번이니 좀 일찍 가야겠다고 25분전에 도착하였더니 자리가 없다고 좀 있다가 오란다. 나와서 시간을 보내려고 반월당 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니 길 바닥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해설을 읽어보니 대구를 상징하는 연구산 거북이를 실물 모형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2009년 12월에 설치하였다고 되어있었다. 2009년 이후 이 길을 여러번 다녔을터인데 어떻게 오늘 내 눈에 들어왔을까... 아마 관심없이 다녀서 그럴 것이다.

서울의 사직단은 처음 보다.

흔히 사극을 보면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라고 신하가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모습을 가본다. 그 종묘사직이란 종묘는 잘 알고 있는 임금이나 왕비들의 신을 모신 곳이다. 그럼 사직이란 사는 땅의 신이고 직은 곡식의 신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사직단이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도 있고 복원한 곳도 많이 있다. 대구에는 시지에 사직단이 있다. 몇번 가보았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에 있는 사직단을 보니 엄청 넓었다. 대구의 사직단의 100배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문이 잠겨있어서 안에 들어가보지는 못하였으나 담장밖에서 사진은 찍었었는데... 어떻게 된지 없어져 버렸다. 이 사진은 다른 사람의 것을 옮겨놓았다.

광화문 현판 글씨

광화문 현판은 1865년 (고종2년)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光化門 현판은 1950년 6.25전쟁으로 소실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1968년 관화문을 복원하면 박정희가 한글 광화문 현판을 써서 걸었다. 그이후 2005년 1월 24일 정조의 글씨를 집자한 한자현판 光化門 검음바탕에 흰글씨를 추진하였으나 걸리지는 않았다. 다시 2010년 8월 15일에 힌바탕에 검을 글씨 光化門을 걸었었다. 2023년 10월 16일 지금의 현판인 검은바탕에 금색 光化門을 걸었다. 1968년 광화문을 히멘트로 복원하면서 걸었던 현판 박정희 글씨 2005년 한자현판으로 내정한 정조글씨 집자 2010년 8월 15일 다시 고쳐 건 현판 光化門 지금의 현판 2023년 10월 15일 바뀐 현판 다시 고증을 한 결과 검은새 바탕에 금색 글..

오랜만에 문화유적 답사를

3년만에 문화재 답사를 갔었다. 가까운 청도라 점심 먹고 오후 1시 반에 만촌 지하철 입구에서 경산에서 오는 후배의 차를 타고 청도 읍성을 보러 갔었다. 가니 이미 다른 친구 2명도 와 있었다. 30여년전 내가 처음으로 석빙고를 보러 갔었을 때는 읍성이라는 것은 흔적도 없었고 석빙고 앞에 밭둑이 읍성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누구가 보아도 성이라고는 믿을 수 조차 없었다.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그냥 밭둑이었었다. 그런데 5년전인가 각보니 다듬은 각돌로 50미터 정도 쌓았더니 오늘 보니 200여미터가 되는 듯 하고 치성과 옹성 등 성의 흉내는 다 내었다. 그런데 이 큰 각돌들은 어디서 가져왔을까가 궁금하였다. 성 안에서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던 집 오늘 처음 보는 집이었다. 성류 현재 남아 있는 ..

발해 마을

나는 경산에 발해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얼마전에야 알았다. 경산 근무를 20여년 하여도 한번도 발해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없었는데 얼마전 영남일보 신문에 발해마을에 대한 기사를 보고서 한 번 가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가 어제서야 찾았는데 가서 보니 그 바로 옆을 몇번이나 지나쳤으나 몰랐었는지. 당시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지... 남천면을 지나다보니 파출소가 있기에 들어가서 길을 물으니 삼갈래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된다고 하였다. 가르쳐주대로 가니 송백1리가 나왔는데 거기에는 신문에서 본 깃발이 보이지 않아서 계속 가다보니 길 옆에 커다란 바위에 발해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우측으로 보니 신문에서 본 깃발들이 세워져 있어서 그 쪽으로 가니 집하장이 나오고 마을 안내 표지판이 있어서 차를 세워..